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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의 시대 - 이스라엘 편

by 나노그램 2024.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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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축의 시대는 어떠했을까?

이스라엘에 대한 역사적 기반은 성경이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반이 약하다.

이스라엘을 둘러싼 주변부의 역사기록을 첨가하여 

이스라엘 축의 시대 변화를 보여준다.

 

 

축의 시대 이스라엘 편을 요약해 본다.

 

<불안과 공포의 시대 - 기원전 900년 - 800년경>

 

1. 최초의 유일신 숭배자 엘리야

 

1) 기원전 9세기말에 이르자 북부왕국 이스라엘은 지중해 동부에서 강국이 되었다.

- 이스라엘 왕국은 다마스쿠스, 페니키아, 모아브 등과 대립하면서 버티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2) 오므리 왕의 아들 아합은 페니키아 공주 이세벨과 결혼했다.

- 이세벨은 페니키아의 바알 신앙을 이스라엘에 들여왔다.

- 솔로몬 또한 외국의 공주들과 외교적인 결혼을 하고 왕실 신앙에 그들의 신들을 포함시켰으며, 예루살렘 바깥 언덕에 그 신들을 위한 신전을 지었다.

- 아합은 불운하게도 이스라엘 민족이 야훼만을 섬겨야 한다고 믿었던, 수는 적지만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소수의 분노를 샀다.

 

3) 아합은 배교자가 아니었다.

- 그는 정기적으로 야훼의 예언자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 아내의 바알 숭배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 야훼 신앙은 수백 년 동안 바알의 찬가와 제의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았다.

- 바알 숭배는 기원전 6세기까지 이스라엘에 널리 퍼져있었으며, 주민 대다수는 야훼 외에도 다른 현지신을 섬겼다.

 

4) 기원전 9세기에 이르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섬기는 신의 숫자를 줄이기 시작했다.

- 야훼는 전사신이었으며 농업이나 다산의 전문가가 아니었다.

- 따라서,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풍년을 보장받으려고 바알과 아나트의 고대 제의를 거행했다.

- 바알은 땅을 비옥하게 하는 신이었다.

5) 소수의 예언자들은 야훼만을 섬기고 싶어 했으며 야훼가 그의 민족이 원하는 모든 것을 제공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 예언자는 미래를 예언하는 사람이 아니다.

- 영어의 prophet라는 말은 그리스어 prophetes 즉 신을 대신해서 말하는 사람에서 왔다.

 

6) 엘리야의 이름은 '야훼는 나의 신'이라는 뜻이다.

- 그는 배타적인 야훼 숭배를 고집한 첫 예언자로 기록에 남아있다.

- 고대 중동 신학에서 엘은 각 민족마다 신을 하나씩 임명했다.

- 야훼는 이스라엘의 신성한 자였다.

- 케모시(그아브)는 모아브의 신성한 자였다.

- 밀콤(밀곰)은 암몬의 신성한 자였다.

 

7) 엘리야는 바알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았지만, 그가 이스라엘 신이 아니기 때문에 페니키아에 머물러야 한다고 믿었다.

8) 엘리야는 이스라엘에 유일신을 섬길 것을 제안하여 전통 종교에 새로운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 사람들은 바알 신앙을 통하여 세계에 대한 이해 수준이 높아지고, 밭이 비옥해지고, 불모나 기근과 싸우는 투쟁에 의미를 부여받는다고 생각했다.

- 엘리야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야훼, 다산 분야에서는 전형 명성이 없는 야훼만을 믿으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9) 엘리야와 바알 예언자들의 싸움에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새로운 갈등이 시작되었다.

- 이때부터 경쟁하는 신들과 벌이는 살벌한 경합이 예언자들이 지닌 영성의 특징이 되었다.

 

10) 기원전 876년 아시리아 왕이 지중해 연안의 페니키아 도시들을 정복했다.

- 아합은 아시리아에 도전하지만 전사하고, 오므리 왕가는 끝이 났다.

- 궁정 쿠데타가 일어나 엘리야의 제자 엘리사가 밀던 예후가 왕좌를 차지하고 아시리아와 동맹을 맺었다.

- 이스라엘은 아시리아가 총애하는 봉신국으로서 새로운 평화와 번영의 시기를 맞이한다.

11) 일신 숭배는 예배 협정이었다.

- 야훼 유일 운동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야훼에게만 희생제를 드리고, 다른 신들에 대한 신앙은 무시하라고 촉구했다.

 

<자아의 발견 - 기원전 800년 - 700년경>

 

2. 분노하는 야훼의 대리자, 이사야

 

1) 기원전 8세기에 읽고 쓰는 기술이 셈족 세계의 서부와 지중해 동부로 퍼져나갔다.

- 서기들은 고대의 이야기와 관례를 보존하기 위해 왕실 문서 보관소를 만들기 시작했다.

- 기원전 8세기 말경에 모세 오경의 일부가 처음으로 글로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2) 아시리아의 충성스러운 봉신인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 치세에 경제적 호황을 누렸다.

 

3) 이 무렵 이스라엘과 유다의 종교는 매우 시각적이었다.

- 종교를 소중하게 간직해 온 관행이나 믿음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었다.

- 호세아는 사람들에게 야훼가 전쟁의 신일뿐 아니라 풍년을 줄 수도 있는 신이라는 점을 설득해야 했다.

- 엘리야가 믿음을 정화하는데 집중했던 반면, 호세아의 관심은 윤리적인 것이었다.

 

4) 이스라엘과 유다 두 왕국 모두 글을 행적적인 목적으로 이용했지만, 글로 나라의 역사나 이념을 기록하지는 않았다.

- 기원전 8세기까지 글은 신성한 것, 인간에게 잠재적으로 위험할 수도 있는 신비한 기술로 여겨졌다.

 

5) 아시리아의 융성은 신학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 종속된 민족들 각각은 민족의 신, 즉 야훼처럼 그 영토의 관리자 역할을 하는 '신성한 자'를 두고 있었다.

- 아시리아가 나라들을 차례로 집어삼키기 시작하자 신들 간의 세력 균형 또한 바뀌었다.

 

6) 야훼는 민족의 신이 아니라 역사의 신이 되어갔다. 

- 야훼가 단순이 이스라엘의 수호신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신들도 통제할 수 있다는 이사야의 혁명적인 생각은 도전적인 애국주의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7) 역사의 시간에서 애국적 자긍심과 배외주의적 신학이 나라를 거의 멸망으로 이끌었다.

 

<앎을 향한 기나긴 여행 - 기원전 700년 - 600년경>

 

3. '책의 종교', 유대교의 탄생

 

1) 기원전 7세기는 이스라엘에서 종교로써 유대교가 시작되는 분수령이다.

-  므낫세는 야훼만을 섬기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 므낫세 사후 아들 아몬은 2년을 다스리다가 시골 귀족들이 주도한 궁정 봉기 때 살해당했다.

- 아몬의 아들 요시아의 어머니는 시골 귀족 출신으로 요시아 역시 쿠데타 일파와 같은 부류였다.

 

2) 요시아는 야훼만을 배타적으로 섬기고 싶어 했던 것 같다.

- 솔로몬 성전 확장 사업을 개시했다.

- 사업 기간에 대제사장 힐기야는 율법의 서를 찾았다고 하며, 이것이 야훼가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준 진짜 율법이라고 말했다.

- 기원전 8세기까지 이스라엘이든 유다 왕국이든 종교적 텍스트를 읽거나 쓰는 일은 거의 없었다.

- 야훼의 가르침을 적어놓은 전통도 없었다.

- 그러므로 고대에 쓰인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경전인 것이 분명하다.

- 이 시기에 새로운 종교적 가르침을 전하고 싶은 사람은 자신의 말이 과거의 위대한 인물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관례였다.

 

3) 두루마리에 적힌 말 (발견되었다고 주장한)의 의미를 찾는다면

- 종교가 구전 전승에서 기록된 텍스트로 전환되었다.

- <신명기> 저자들은 야훼 신앙을 책의 종교로 만들었다.

4) 요시아는 야훼의 토라를 따를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 므낫세가 도입한 종교 전통을 없애고, 바알과 아세라상을 태우고, 시골 신전을 폐지하고, 여러 다른 신상을 파괴했다.

- 옛 이스라엘 왕국에서 베델과 사마리아의 옛 야훼 성전을 파괴했으며 신전의 사제들을 죽이고 그 제단을 더럽혔다.

5) <신명기> 저자들은 자신들이 이스라엘의 원래 신앙으로 돌아가는 보수주의자들이라고 주장했다.

- 그러나 사실은 그들은 급진적이고 혁신적이었다.

- 이스라엘 예배는 중앙집권적으로 바뀌었다.

- 기원전 7세기에는 오직 한 곳,  예루살렘 성전만이 희생제를 드릴 수 있었다. 

 

6) <신명기> 저자들에게 요시아는 핵심적인 존재였으며, 그가 다윗보다 위대한 왕이라고 믿었다.

- 그들은 법을 개혁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를 다시 쓰기도 했다.

7) <신명기> 저자들은 유대교를 책의 종교로 만들었다.

- 기록된 텍스트는 붓의 술책만으로도 정통성을 뒤집을 수 있고, 지혜보다 지식을 주어 전통을 왜곡할 수 있었다.

8) 부상하고 있던 바빌로니아 제국과 아시리아의 싸움에서 아시리아를 지원하려 오는 이집트군과 교전에서 요시아는 전사했다.

- 요시아가 죽자 개혁도 모두 끝이 났다.

 

<고난의 시대 - 기원전 600년 - 530년경>

 

4. 추방당한 자들의 트라우마

 

1) 기원전 6세기 이스라엘은 본격적으로 축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 변화의 촉매는 충격적인 폭력의 경험이었다.

- 새로운 축의 시대 전망을 창조한 사람들은 처음으로 바빌로니아에 끌려간 사람들이었다.

- 이스라엘은 암흑시대로 접어들었다.

 

2) 예언자 예레미아는 추방당하지 않았다.

- 반항은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하여 일관되게 바빌로니아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배반자이다.)

- 예레미아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는 축의 시대 핵심원리 가운데 하나를 표현했다.

-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모든 것을 잃었기 때문에 내면으로 향했으며, 직접적인 앎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3) 추방은 단지 주소만 바뀌는 것이 아니다.

- 그들은 충격적인 지위 상실을 경험했다.

- 피난민 가운데 일부는 이제 야훼를 섬길 수가 없었는데, 야훼가 바빌로니아 신 마르두크에게 완전히 패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4) 왕실 율법학자들은 계속 이전의 텍스트를 편집했다.

- <신명기> 저자들은 불행을 설명하려고 역사에 여러 구절을 보탰다.

- 사제들은 예배도, 신전도 없는 바빌로니아 생활에 맞추어 고대 전승을 개작하기 시작했다.

- 그들은 역사를 다시 쓰고, 관습을 고치고, 전통적인 신성한 상징을 근본적으로 혁신하는 방식을 해석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5) 젊은 사제 에스겔(에제키엘)

- 에스겔의 임무는 추방당한 사람들에게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품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 에스겔은 희생제, 제의, 성전의 치수와 크기에 관해 긴 시간을 들여 이야기한다.

- 이유는 사회적 불확실성의 시기에는 제의가 새로운 중요성을 띠기 때문이다.

- 에스겔은 위대한 예언자들의 마지막 세대에 속한다.

 

6) 추방당한 사제들로 이루어진 소규모 집단은 낡은 것의 파편 위에 새로운 영성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 가장 중요한 자료는 기원전 7세기에 모은 잡다한 율법들 중 '성결법전'과 '성막문서'이다.

- 의도적으로 성막의 건설을 세계 창조와 연결했으며, 이스라엘 역사는 <민수기>에서는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당당하게 이동하는 것으로 제시된다.

- 여기에 사제 전승을 보태어 자기 민족의 역사를 고쳐 써서 바빌로니아로 추방당한 것이 일련의 비극적 이주 가운데 가장 최근의 이주에 불과함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정신승리라는 것이다.)

 

7) 민족의 성전이 파괴된 이스라엘은 사제들의 나라다.

- 모든 사람이 성전에서 신성한 존재를 섬기듯 살아야 한다.

- 추방과 신성함 사이에 심오한 연결 고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 <레위기>에서 야훼는 희생, 사회적, 종교적 삶등과 관련된 자세한 규정을 제시한다.

 

8) 모든 것이 제자리를 잡은 세계를 환기하는 것은 추방이 남긴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 무자비한 제국 권력의 과시는 추방당한 사람들의 민족적 통일성을 훼손했다.

- 이런 상황에서 추방당한 사제와 예언가들은 모든 생명의 신성함을 인정하는 영성을 창조함으로써 위대한 성취를 이루었다.

 

<공감의 발견 - 기원전 530년 - 450년경>

 

5. 고난의 길에서 태어난 일신교

 

1) 중동의 새로운 강자 키루스는 사상 최대의 제국을 다스리는 통치자였으며, 조로아스터교의 가르침을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었다.

- 그러나, 자신의 믿음을 신민에게 강요하지는 않았다.

- 유다의 한 예언자는 그들 메시아, 야훼의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라고 불렀고, 이 예언자를 제2의 이사야라고 부른다.

2) 제2의 이사야는 모세오경과는 거의 관계가 없는 신화적 전승에 의존했다.

- 그는 성경집필집단 중 하나인 P 그룹이 우주론에서 세심하게 배제한 폭력을 복권시켰다.

 

3) 제2의 이사야가 보여주는 공격적인 신은 축의 시대 이전의 신성한 전사를 되돌아보게 했으며, 과거 미발달 상태의 신화적 전망으로 되돌려 놓았다.

4) 키루는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직후 복속된 민족의 신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신전을 다시 지으라는 칙령을 발표했다.

- 키루스의 정책은 관대했지만 동시에 실용적이었다.

- 아시리아나 바빌로니아 제국에서 시행했던 재정착 프로그램보다 비용이 싸게 먹히고 능률적이기 때문이었다.

 

5) 그들이 귀환한 지 20년 뒤에도 야훼에게는 성전이 없었다.

- 새로운 예언자 학개는 성전을 짓는 것이 먼저라고 말했다.

- 성전의 기초는 기원전 520년 가을에 완성되었다.

 

6) <역대기 상. 하>는 제2차 성전을 건축하는 동안 기록되었을 것이다.

- 사제들은 초기 복원기의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신명기>의 역사를 수정했다.

- 이들은 성전이 유다왕국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성소였다고 주장했다.

-<역대기> 기록자는 다윗의 통일 왕국 재수립을 고대했다.

- 그들의 목적은 성소 둘레에 야훼의 백성을 단결시키는 것이었다.

 

<사유의 혁명 - 기원전 450년 - 398년경>

 

6. 에즈라의 닫힌 길, 요나의 열린 길

 

1) 이스라엘에서는 축의 시대가 끝이 나고 있었다.

- 이스라엘의 축의 시대는 바빌론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 돌아온 사람들은 새로운 종교적 전망을 탐색하는 일보다 생존 투쟁에 직면해 있었다.

2) 에즈라의 사명은 예루살렘에 토라를 퍼뜨려 그것을 그 땅의 공식적인 법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 이스라엘 구성원이 될 자격은 바빌로니아로 추방을 당했던 사람들의 후손과 예루살렘의 공식 법전인 토라에 복종할 각오가 된 사람들로 한정되었다.

 

3) 기원전 5세기와 기원전 4세기에 성경이 편찬되면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더 포용적인 전통도 등장했다.

4) 어떤 인간도 불결하지 않다고 주장한 사제 저자 P그룹의 전통이 모세오경 앞쪽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를 지배했으며, 그 결과 <신명기> 저자들의 배타적인 전망을 제한했다.

 

<축의 시대의 귀환 - 기원전 2세기 이후>

 

7. 토라의 원리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다'

 

1) 유대인의 축의 시대는 이산과 재정착이라는 어려운 상황 때문에 갑자기 중단되고 막혀버렸다.

- 유대인은 로마의 강압적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투쟁하였으나 서기 1세기, 서기 70년에 있었던 로마의 예루살렘 정복은 유대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 흩어진 유대인보다 더 보수적인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은 예루살렘 성전이 부패했다고 생각하여 이미 주류사회에서 물러나 있었다.

- 에세네파와 쿰란파는 자신들의 정화된 공동체가 영혼의 새로운 성전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 그들은 축의 시대 이후 발전한 묵시록적 경건함에 물들어 있었다.

 

2) 에세네파

- 기원전 2세기경부터 서기 1세기말까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활동한 유대교 교파를 말한다.

- 수도원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 재산을 공유하고 금욕적이고 경건한 삶을 추구했다.

- 바리사이파와 마찬가지로 모세 율법, 안식일, 정결의식을 철저히 지켰고, 불멸과 죄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믿었다.

- 바리사이파와 달리 육체의 부활은 부정했고, 두루 섞여 살기를 거부했다.

- 에세네파에 여러 문파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는데 쿰란파(쿰란 공동체)도 그중 하나다.

3) 쿰란파

- 사해문서 가운데 쿰란 사본을 만들어낸 사람들 일파를 말한다.

- 쿰란파는 자신들은 '언약의 백성', '선택된 자', '참된 이스라엘' 등으로 불렀다.

- 이들은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며 살았다.

 

4)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진보적인 유대인은 바리사이파로 그들은 유대교의 축의 시대에서 가장 포용력 있고 진보적인 영성을 발전시켰다.

- 그들은 이스라엘 전체를 사제들의 신성한 나라로 불러야 하며

- 신은 성전만이 아니라 가장 초라한 집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고 믿었다.

- 유대인은 정교한 제의 없이 신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설파했다.

- 자선은 율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계명이었다.

 

5) 랍비 힐렐

- 토라의 본질은 율법의 글자가 아니라 그 정신이다.

6)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

- 우대인이 로마제국을 이길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전쟁에 반대했다.

- 종교의 보존이 민족 독립보다 더 중요했다.

- 그는 관에 숨어 도시 성문을 지키고 있던 열심당원으로부터 예루살렘을 빠져나갔다.

- 그는 로마진영으로 가 자신의 제자들과 팔레스타인 남부 해안의 야브네에서 살게 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뒤 야브네는 유대종교의 새로운 수도가 되었다.

7) 열심당(젤로트람)

- 유대교 분파 가운데 가장 공격적인 정치적 당파로써 로마와 로마가 신봉하는 다신교를 철저히 배척했다.

- 유대인 가운데 로마와 평화나 화해를 바라는 자들을 경멸했다.

- 서기 66년에 일어난 로마와의 전쟁 때 선봉에 섰다.

- 서기 73년 로마 제국에게 마사다 요새를 넘겨주게 되자 집단 자살을 택했다.

8) 랍비 유대교

- 서기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제국에 의해 파괴된 뒤에 바리사이파 랍비들이 발전시킨 율법적 형태의 유대교

- <탈무드> 안에 있는 법률문서와 주석서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지금까지 전 세계에 퍼져있는 모든 유대인이 지켜야 할 예배양식과 생활양식을 제시했다.

9) 서기 132년 로마인에게 죽임을 당한 랍비 아키바 벤 요셉

-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이 토라의 가장 위대한 원리라고 가르쳤다.

- 종교는 다른 모든 인간을 항상 존중하는 마음을 실천에 옮기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

- 황금률을 실천하지 않고 누가 되었건 같은 인간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신을 섬길 수 없다.

 

10) 랍비 유대교에서 공부는 다른 종교 전통의 명상만큼 중요했다.

- 그것은 영적 탐구였다.

- 공부는 행동과 떨어질 수 없었다.

- 공부는 신과의 역동적인 만남이었다.

11) 랍비들은 궁극적으로 실재가 초월적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축의 시대의 원리를 받아들였다.

- 유대인은 신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 신을 표현하려는 모든 시도는 매우 부적절하며 잠재적으로 신성모독이 될 수 있다.

- 랍비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기도하면서 신을 너무 찬미하지도 말라고 경고했다.

- 그들의 말에는 결함이 있을 수밖에 없고, 어떤 신학도 결정적일 수 없었으며, 예언자들 또한 각기 다른 '신'을 경험했다.

- 우리가 '신'이러고 부르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지는 않았다.

- 각자의 인격이 각자의 신이라는 개념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12) 기독교는 유대인이 되는 새로운 방법을 찾고자 했던 서기 1세기 운동 가운데 하나로써 시작되었다.

- 기독교는 서기 30년경 로마에게 십자가형을 당한 갈릴리의 한 신앙요법사의 삶과 죽음이 중심이 되었다.

- 그의 추종자들은 그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했다고 주장했다.

- 그들은 나사렛 예수가 오랫동안 기다리던 유대인 메시아이며, 그가 곧 영광 속에 다시 돌아와 지상에 신의 왕국을 열 것이라고 믿었다.

- 그는 '신의 아들'이다라는 것은 유대인들이 신으로부터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고 신과 친밀한 관계를 누리는 특권을 부여받은 사람을 의미한다.

- 고대 왕실 신학에서는 이스라엘 왕을 야훼의 아들이자 종이라고 보았다.

- 예수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 의도가 없었으며, 뿌리 깊은 유대교도였다.

- 복음에 기록된 그의 많은 말은 바리사이파 가르침과 비슷했다.

 

13) 기독교를 이방인의 종교로 만든 사람은 최초의 기독교 저술가 바울로였다.

- 그는 예수가 '메시아',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도 했다고 믿었다.

- 바리사이파 출신인 바울로는 코이네 그리스어로 글을 썼다.(신약성서가 이 언어로 기록되었다.)

- 그는 두 세계를 연결하면서 자신이 비유대인, 즉 외국에 사명이 있다고 확신했다.

- 예수는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의 메시아이기도 했으며, 하느님은 만인에게 관심이 있었다고 보았다.

- 바울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인류 전체에게 열려있는 새로운 이스라엘을 창조했다고 확신했다.

- 바울로는 자신이 제한된 개별적 자아를 초월했다고 주장하였으며, 훗날 기독교인은 정통성 즉 '올바른 가르침'의 수용을 중시하는데 이것은 결국 종교와 믿음을 동일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14) 서기 70년에서 100년경에 기록된 복음은 바울로의 노선을 따른다.

- 복음서들은 예수가 나중에 유행하는 삼위일체나 원죄 같은 교리를 가르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 대신 예수는 '모든 이에 대한 관심'이라고 불렀을만한 것을 실행에 옮겼다.

- 예수는 또 아힘사의 인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그의 가장 놀라운 가르침은 모든 증오를 금지한 것이다.

 

<축의 시대 이스라엘 편을 읽고서>

 

축의 시대 이스라엘이 추구한 것은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은 고찰보다는 신에 대한 것이 더 중요했다.

분리되고 흩어진 이스라엘 부족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그들의 정신적 지주가 필요했다.

이스라엘은 신의 나라이며, 사제의 나라다.

그들에게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의 밑바탕이 될 뿐이다.

제의 의식을 도맡아 처리하게 된 지파가 나온다.

모세의 출애굽 당시 모세의 형인 아론이 제사장의 직책을 도맡게 된다.

그로부터 파생되어 온 제사장, 사제 계급은 생산활동에서 열외 되었으며, 그들을 떠받치는 것은 일반 민중이었다.

일반 민중에게는 신에 대한 접근이 쉽지 않았으며, 오로지 사제를 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후에 바리사이파는 일반 민중도 쉽게 신에게 접근할 수 있으며, 그들의 기도 또한 제의식을 거치지 않고 신에게 도달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스라엘의 축의 시대를 보면 그들은 정교일치의 원시적 형태의 국가를 운영하였으며, 정교가 분리되었을 때에도 왕보다는 사제 계급이 더 힘이 있었다.

이러한 예는 각국의 국가 형태 발전에서 보여준다.

원시 사회가 부족국가를 넘어 원시국가로 발전하면서 종교와 정치의 싸움은 늘 있어왔으며, 종교를 극복한 국가는 고대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에서 본다면 이스라엘은 원시 국가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국가 형태의 발전을 저해한 주변의 환경이 좋지 않았다.

 

지금의 성경이 만들어진 것은 후대다.

문자로 기록된 성경이 무조건 옳다고 믿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것은 

성경의 만들어진 역사적 배경과 지금의 66권으로 결정되게 흐름과

성경 이전의 유대와 이스라엘의 역사와 그 이전의 중동역사와 일본인에 의해 호칭된 4대 문명 중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대한 역사와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제국의 역사까지 들여다보아야 보면 레반트 지역의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를 검증하면서 성경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 축의 시대는 발전되지 못한 국가 형태를 보여주며

다만, 소수 엘리트의 전유물이 각각의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흐름으로 발전되는 모습이 조금 만족스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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