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는 제의 개혁가들이 희생 경쟁에서 갈등과 공격성을 빼내면서 시작되었다.
축의 시대 인도 편을 요약해 본다.
<불안과 공포의 시대 - 기원전 900년 - 800년경>
1. 아트만, 내 안의 진정한 나
1) 기원전 9세기에 이르면, 인도의 제의 전문가들은 인도의 축의 시대를 여는 전례 개혁에 나선다.
- 그들은 희생제를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과정에서 내적 자아를 발견한다.
- 제의 전문가들은 관심을 외부 세계로부터 내적인 영역으로 이끌었다.
- 인간은 결함이 많은 상태로 태어났으며 오직 제의에 의해 완전함을 이룰 수 있다.
2) 의식에서 희생제를 드리는 사람은 그의 자아(아트만)를 재구성한다.
- 전례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내면세계의 발견이다.
3) 아트만이란 무엇인가?
- 한 인간을 독특하게 만드는 그 사람의 본질적이고 영원한 핵심을 가리킨다.
4) 인도에서 축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자아라는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창조했다.
- 지식을 축적하는 것도 중요한 것으로 강조된다.
- 인도의 영적인 탐구는 외적인 신이 아니라 영원한 자아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자아의 발견 - 기원전 800년 - 700년경>
2. 숲으로 간 현자, 영적 탐구의 선구자들
1) 인도 북부 갠지스강 지역 생활은 점차 안정되었다.
- 출가자(삼야신)들은 인도 영적 탐구에서 중심이 되었다.
- 출가자들은 내적 세계를 탐험하고 깨달음을 위한 내적 투쟁을 하였다.
- 출가자들은 외적으로 표현하는 종교에서 내적으로 실행에 옮기는 종교로 이행하였다.
- 출가자들은 깨달음을 추구했는데 이것은 자신의 진정한 자아에 '눈을 뜨는 것'이기도 했다.
<앎을 향한 기나긴 여행 - 기원전 700년 - 600년경>
3. 인간 내면의 정복, 우파니샤드
1) 고대 베다 종교는 끊임없는 이주와 새로운 영토의 정복에서 영감을 받았다.
2) 우파니샤드의 초점은 아트만, 즉 자아였다.
- 아트만은 브라만과 동일하다.
- 우주의 근본 원리인 브라만과 개인의 본질인 아트만이 궁극적으로 같다는 뜻이다.
3) 첫 우파니샤드는 도시화 과정의 출발점에 놓은 사회가 배경이었다.
- 교통이 더 편리해지고 생활은 더 안정되고, 여러 민족이 왕성하게 뒤섞이고 있었다.
- 새로운 만남은 지적인 자극을 주었고, 출가자 또한 금욕적 생활 방식을 실험하면서 신선한 발상을 할 수 있었다.
4) 새로운 영성의 목표는 알 수 없는 아트만을 아는 것이었다.
- 카르마 (불교에서 업)는 인도 영성의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 죽음과 재생의 고통스러운 순환에서 해방되는 것(해탈)이 영적 생활의 목표이며 이것은 내적인 앎의 탐구로만 얻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5) 우파니샤드는 몸과 영혼을 나누지 않고 인간을 복합적 전제로 보았다.
- 우파니샤드 현자들은 인성의 핵심을 찾고 있었다.
- 자기주장을 하던 에고를 버릴 때에만 효과가 있는 영적 기술을 발견하는 중이었다.
<고난의 시대 - 기원전 600년 - 530년경>
4. 상키아, 인류 최초의 무신론
1) 인도에서는 새로운 철학이 나타났다.
- 이 철학은 상키아(분별)라고 부른다.
- 원래 이 말은 그냥 '사유' 나 '토론'을 의미했다.
- 상키아는 우즈를 낱낱의 구성요소로 분석해 들어가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갔으며, 우리의 세상을 만들어낸 진화의 과정을 묘사했다.
2) 상키아 체계에서 최고 실재는 푸루샤 (인가 또는 자아)였다.
- 아트만과 마찬가지로 푸루샤도 규정이 불가능하다.
- 푸루샤는 인간의 본질이지만 영혼은 아니다.
- 푸루샤는 우리가 아는 것 같은 지성이 없으며 욕망도 없다.
3) 상키아 학파는 자연에 3가지 서로 다른 가닥이 있다고 가르쳤다.
- 사트바 : 지혜. 푸루샤에 가장 가깝다.
- 라자스 : 열정. 신체적 또는 정신적 에너지
- 타마스 : 타성. 가닥 가운데 가장 저급한 수준
4) 상키아 관점에서 보면 희생제는 소용이 없었다.
- 신들 또한 자연에 갇혀있으니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다.
5) 상키아는 인도의 영성에 2가지 중요한 기여를 했다.
- 신, 인간, 동물, 곤충 등 모든 창조물이 고통을 겪지만 오직 인간만이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상태에 이를 수 있다.
- 요가는 오랜 시간에 걸쳐 수행자에게 정상적인 의식과 더불어 그 의식의 잘못과 미망까지 없애버리고 대신 푸루샤 발견의 환희를 채우도록 가르치는 가혹한 수련법을 만들어냈다.
* 고전적인 요가는 오늘날 서구에서 가르치는 요가와 많이 달랐다.
* 요가라는 말 자체가 '멍에를 멘다'는 뜻이다.
* 요가는 인간이 되는 다른 방식에 입문하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근본적인 정신적 변화를 의미했다.
<공감의 발견 - 기원전 530년 - 450년경>
5. 자이나교, 비폭력과 불살생의 극한
1) 많은 사람들이 낡은 베다 제의에 환멸을 느꼈다.
- 사람들은 제의가 물질적 혜택마저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 모든 행동은 새로운 의무를 낳았고 이 때문에 삼사라(윤회)의 냉혹한 순환에 묶였다.
- 그들은 덧없는 삶을 계속해야 할 운명이라고 느꼈으며, 좋은 카르마로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 많은 사람들이 영적 정복자인 지나(산스크리트로 승리자)나 존재의 다른 영역으로 깨어난 붓다(산스크리트로 깨달은 자)를 갈망했다.
2) 기원전 6세기가 끝날 무렵 부족국가들은 더 큰 단위로 흡수되었다.
- 새로운 도시들은 전통에 순응하는 대신 개인적인 창의와 혁신을 권장했다.
- 개인주의가 부족적이고 공동체적인 정체성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3) 새로 나타난 가르침에는 여러 가지 공통요소가 있었다.
- 삶은 두카(고통)다.
- 자유로워지려면 금욕과 명상으로 행동에 이르는 욕망을 제거하라.
- 목표는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이다.
4) 새로운 이상은 단지 폭력을 삼가는 것이 아니라 가없는 친절과 자비를 키워나가는 것이었다.
<사유의 혁명 - 기원전 450년 - 398년경>
6. 고타마 싯다르타, 무아의 발견자, 마음의 혁명가
1) 기원전 5세기말 무렵, 고타마 싯다르타는 출가했다.
- 인간의 삶은 출생에서 시작되어 늙고, 병들고, 죽고, 슬퍼하고, 부패하는 것으로 진행되다가 다음 생의 주기에 다시 반복되었다.
- 고타마는 이런 고통스러운 상태에는 긍정적인 대응물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 이 모든 굴레로부터 최고의 자유를 찾으려 했으며, 이런 행복한 해방을 '니르바나(열반)'라고 불렀다.
2) 고타마는 오로지 자신의 통찰에만 의존하려 했다.
- 그의 영적 방법론의 종교 교의 가운데 하나가 된다.
- 그는 평생 형이상학적 교의에는 회의적이었다.
- 의심 없이 또는 간접적으로 어떤 교리를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설파했다.
- 심지어 고타마 자신의 가르침도 깨달음을 주지 못하면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3) 고타마는 삶이 두카(고통)이며, 우리의 고난은 욕망 탓이라고 확신했다.
4) 고타마는 요가의 '깨어있음'훈련을 통해 갈망이나 욕심이나 이기심에 지배되지 않는 새로운 인간이 태어난다고 주장했다.
- 고타마는 매일 요가를 연습하여 의식의 다른 상태로 들어갔으며, 각각의 연속적인 황홀경을 세계 전체를 향한 자비의 감정과 융합했다.
- 고타마의 이런 명상을 '가없는 마음(무량심)'이라고 불렀다.
5) 고타마는 '고귀한 진리'가 유일무이한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6) 니르바나란 무엇인가?
- 이 말은 '꺼졌다'는 뜻이다.
- 꺼진 것은 그의 인격이 아니라 욕심, 증오, 기만의 불이었다.
- 해로운 마음 상태를 눌러 없앰으로써 자기가 없는 상태로부터 오는 평화를 얻었다.
- 니르바나는 각 사람의 내적 존재 안에서 발견되며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다.
- 니르바나는 삶에 의미를 주는 고요한 중심이다.
- 니르바나는 오점이 없고, 약해지지 않고, 허물어지지 않고, 침해할 수 없는 것이며 괴로움이 없는 상태, 적개심이 없는 상태였다.
- 니르바나는 우리가 삶에서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없앤다.
- 니르바나는 인간과 신 모두에게 최고의 목표였으며, 불가해한 고요였으며, 완전히 안전한 피난처다.
7) 고타마는 늘 지고의 존재를 부정했다.
- 감독하는 권위적인 신 또한 깨달음을 방해하는 또 다른 버팀목이나 존재가 될 수 있다.
8) 고타마에게 깨달음을 안겨준 것은 세상 모든 곳을 향한 공감과 자비였다.
9) 고타마는 늘 자신이 가르치는 모든 것을 시험해 보라고 제자들에게 강조했다.
- 종교적 관념은 정신적 우상, 또 한 가지 집착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다.
- 다르마의 목적은 사람들이 버리도록 돕는 것이다.
- 고타마의 가르침도 그 목적을 달성하면 버려야 한다.
10) 고타마에게 세계 창조나 하느님의 존재에 관한 이론이 없다.
- 세상을 창조한 하느님을 아는 것이 뭐가 중요한가?
- 그것을 안다 해도 비통과 고통과 비참함은 계속될 것이다.
-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이미 올바르게 사는 법을 알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11) 고타마는 폭력적이고 슬픈 세상에 살던 자기 시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평화로운 안식처 역할을 했다.
- 스스로를 다스리고, 자신을 비롯한 모든 생물과 조화를 이루면서 평화롭게 사는 것이 가능하다.
<철학의 모험 - 기원전 400년 - 300년경>
7. 두려움에 떠는 전사들의 서사시. 마하바라타
1) 마하바라타는 복잡한 다층의 텍스트이며 크샤트리아 전사 계급의 에토스를 반영한다.
2) 각 계급의 의무는 신성했다.
- 각 계급에게는 침해 불가능한 신이 정한 생활 방식이 있었다.
- 브라민의 의무는 베다 전승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었다.
- 크샤트리아는 법, 질서, 방어를 책임졌다.
- 바이샤는 부의 생산에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 출가자는 전사와 상인들의 지원에 의존했다.
3) 왕, 전사, 상인은 자신의 의무를 성공적으로 이행하려면 (붓다의 표현을 빌리면)'해로운' 방식으로 또는 죄가 되는 방식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 특히, 크샤트리아의 소명이 문제가 되었다.
4) 마하바라타는 이런 문제를 놓고 고민을 했지만 만족스러운 해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 마하바라타는 친척간인 카우라바 집안과 판다바 집안이 쿠로- 판찰라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벌인 격렬한 전쟁이야기를 전한다.
- 마하바라타에서는 이 전쟁을 선과 악의 갈등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 이 서사시를 읽다 보면 오직 엘리트 집단만 위대한 변화에 관여했음을 알게 된다.
5) 마하바라타에는 전사의 소명을 옹호하고 싸움과 죽음을 기뻐하는 구절이 수도 없이 많지만, 근본적인 의심은 남아있다.
- 이 서사시는 축의 시대의 영성이 인도의 보통 사람들을 불안하게 뒤흔든 면만 보여준다.
- 낡은 베다 신앙은 자신을 지탱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 폭력, 배신, 진실 은폐라는 파괴적인 순환은 비극적인 허무주의를 낳게 된다.
<제국의 시대 - 기원전 300년 - 220년경>
8. 바가바드기타, 축의 시대 마지막 위대한 노래
1) 인도에서는 새로운 제국이 세워졌다.
- 갠지스강 유역을 지배한 마가다 왕국에서 찬드라 굽타 마우리아가 왕좌를 차지했다.
2) 기원전 268년에 왕좌를 물려받은 3대 황제 아소카는 불교의 후원자가 되었다.
- 그는 왕좌에 오를 때 '신들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 기원전 260년 칼링가 왕국을 정복한 후 칙령에 자신의 승리를 기록하고 그 내용을 바윗면에 새기게 했으며, 아소카의 칙령은 영토 곳곳에 세워졌다.
3) 아소카의 칙령에는 신민들에게 어떤 종교적 배외주의도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 모든 종파, 고행자와 평신도를 똑같이 존중하고 인정해야 한다.
- 누구든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비방하지 말아야 한다.
4) 기원전 231년에 아소카 왕이 죽고 나자 사회적 긴장과 종파 갈등이 시작되었으며 제국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 아소카 사후 인도는 암흑시대로 들어섰으며, 이 시기에 인도의 종교는 유신론적으로 변했으며 사람들은 인격신을 발견했다.
5) 모든 비유신론적 학파들은 창조주 신이라는 이미지와 결합했다.
- 그들은 축의 시대의 통찰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덜 추상적이고 더 감성적인 종교를 원했다.
- 그래서 그들은 자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돌보는 신에 대한 바크티(헌신)라는 개념을 개발했다.
- 신자들은 신에게 저항하는 것을 중단하고 자신의 무력함을 의식하면서 신이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고 믿었다.
6) 바가바드기타는 원래 별도의 텍스트였지만 어느 시점에 위대한 서사시인 마하바라타의 여섯 번째 책으로 통합되었다.
- 축의 시대의 마지막 위대한 텍스트로 꼽힌다.
- 종교적 변화의 순간을 기록하고 있다.
- 접근하기 쉽다는 것이 최대 장점이다.
- 다른 영성들은 소수의 재능 있고 영웅적인 금욕주의자들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반면 이것은 만인을 위한 종교였다.
- 바가바트기타는 축의 시대 영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축의 시대의 귀환 - 기원전 2세기 이후>
9. 새로운 불교 영웅, 보디사트바(보살)
1) 굽타 왕조와 팔라비 왕조가 등장할 때까지 인도의 암흑시대가 이어진다.
- 그러나 불교는 스리랑카, 일본, 동남아시아, 중국에 뿌리를 내렸다.
2) 브라만 신앙은 마우리아 제국이 붕괴한 뒤 중요한 발전을 이루었다.
- 사람들은 그들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신과 더 인간적으로 만나기를 바랐다.
3) 바크티 신앙
- 섬기는 자는 신에게 저항하는 것을 멈추고 신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행동을 하여야 한다.
- 신을 섬기는 사람에게 자신의 무력함과 욕망을 인정하라고 권한다.
- 신상이 매우 중요했다.
- 신은 자신의 상이 신성화되는 순간에 그 안에 내려오며 따라서 그 상은 신성의 거처가 되었다.
- 불교도와 자이나교도 또한 힌두의 이런 새로운 헌신에서 영향을 받았다.
4) 붓다는 늘 개인 숭배를 막았다.
- 인간에 대한 헌신은 의존과 집착 같은 깨닫지 못한 자들의 습관을 부추기는 '족쇄'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 붓다 죽음 이후 붓다의 아이콘들은 점차 매우 중요해졌다.
- 사람들은 붓다의 얼굴에서 고요와 충족을 보면서 인간의 가능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 붓다는 깨달은 인간의 이미지였다.
5) 서기 1세기에 새로운 불교 영웅 보디사트바(보살)가 탄생했다.
- 그는 깨달음을 얻기 직전의 사람이었다.
- 보디사트바는 니르바나 축복 속으로 사라지는 대신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희생하고 다른 사람에게 해방을 발견하라는 가르침을 주려고 삼사라의 세계로 돌아왔다.
- 그들은 고통받는 인류를 도우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바크티의 구원의 신들과 다르지 않았다.
- 보디사트바는 자비의 새로운 모델이었으며, 축의 시대의 오래된 이상을 새로운 형삭으로 번역한 존재였다.
<축의 시대 인도 편을 읽고서>
축의 시대 인도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성찰을 시작하였다.
인도의 변화를 보면 종교적에서 자아를 찾기 위한 개인의 삶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종교로 회귀하는 변화를 보여준다.
깨달음을 중시한 불교가 힘을 잃으면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형상을 찾고, 그렇게 신상을 만들었다.
또한, 사제 계급의 종교가 일반 사람들에게 뿌리내리기 어렵던 상황에서 시대가 변하면서 일반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변화를 했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종교는 그들의 힘을 끌어들이고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신이나 초월적 존재에게 집중하는 마음은 불교의 관점에서 집착이며, 이것은 깨달음을 얻는데 방해가 되는 요소다.
그러나, 사람들은 좀 더 편한 방법으로 쉽게 접근하고 쉽게 믿을 수 있으며, 눈에 보이는 것이 있어야 안정을 찾는다.
그 자신이 방황하지 않게 자신을 붙잡아둘 수 있는 어떤 매개체를 원한다.
어떤 매개체는 경전이며, 신상이며, 시대의 아이콘이다.
인도의 축의 시대가 보여준 것은 시대가 변함에 따라 관념의 변화를 보여준다.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바라는 세상이 무엇인지,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존재의 이유가 무엇인지, 둘러싼 환경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어려운, 해석하기 힘든 인간을 찾아가는 방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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