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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친절한 이슬람 역사 - 이슬람을 알아야 세계가 보인다.

by 나노그램 2024.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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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것을 접했을 때 두려움과 혐오감으로 피하려고 한다.

모르는 것을 접했을 때 모르는 것에 대한 호기심으로 알려고 노력한다.

모르는 것을 접했을 때 그것에 관한 관심을 접고 무시한다.

대부분 사람들의 반응은 이렇다.

특히, 기독교가 강세를 띠는 유럽의 문화를 접하고, 기독교에서 금기시하고 적대시하는 이슬람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종교를 가진 우리나라 사람의 분포는 크게 기독교, 가톨릭, 불교가 비율이 높고, 다른 종교는 비율이 낮다.

기독교의 대척점에 서있는 이슬람의 경우 정보도 부족하고, 그것을 알려고 하지도 않으며, 

우리가 접하는 정보는 대부분 나쁜 쪽으로 굳어진 것이 많다.

 

각 종교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존재하고, 각자가 속한 종교의 나쁜 점을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이슬람 또한 그렇다.

전 세계 인구 분포로 기독교 다음으로 믿는 사람이 많은 이슬람에 대한 간략한 책이 있다.

 

 

1400년 중동의 역사와 문화가 단숨에 이해되는 이슬람 역사서

복잡하고 낯선 이슬람 세계를 처음 마주하는 사람을 위한 친절한 역사서

전쟁과 폭력에 가려진 찬란한 이슬람 역사와 

오해와 편견 너머 우리가 몰랐던 뜻밖의 이슬람을 만나는 역사서

 

경전을 가진 종교가 있다. 크게 기독교의 성경, 이슬람의 코란이 있다.

서로 자기네의 경전이 옳다고 한다.

경전이 있는 종교 중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종교는 가톨릭, 기독교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이슬람의 코란은 모른다.

이슬람에 대한 편견과 무슬림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은 우리가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정확히 알기 어렵게 한다.

반대 진영에 있는 기독교의 일부는 이슬람을 이단이라 칭하고 그들과 적대시한다.

성경의 일부분만 인용하고, 성경의 일부분만 기억하고, 성경의 일부분만으로 다 안다는 착각 속에 빠진 사람들은 성경에 대한 무지를 바탕으로 이슬람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다.

 

우리가 아는 이슬람은 무엇인가?

이슬람이 무엇인지에 대해 자료를 찾기도 쉽지 않고, 이슬람에 대해 알아보는 것조차 금기시하는 시선 속에서 

이슬람 역사를 간략하게 조망할 수 있는 책이 있다.

이슬람 역사는 대략 1,400년으로 본다.

1,400년의 이슬람 역사를 과거부터 현재까지 중요한 포인트만 집어서 쓴 책이 "세상 친절한 이슬람 역사"다.

이 책을 통해 이슬람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조금이나마 없앨 수 있지 않을까?

 

1. 발간 시기

 

초판 1쇄 2024년 1월로 가장 따끈한 이슬람 관련 책이다.

 

2. 이 책의 저자 

 

존 톨란

 

예일대학교에서 고전학 학위와 시카고대학교에서 역사학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파리 사회과학 고등연구원에서 연구 지도자 자격을 취득했다.

북미, 유럽, 아프리카, 중동 등 다양한 지역이 대학에서 강의했다.

현재 프랑스 낭트대학교에서 역사학과 교수를 맡고 있다.

주로 지중해 지역의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 사이 관계망에 대한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3. 이 책의 구성

 

*하디스 - 무함마드의 언행을 기록하고 전승한 것

*이스나드 - 각각의 하디스에는 신뢰성을 검증하는 연결고리로 권위 있는 증인을 열거한 부분

*이슬람 - '복종'으로 풀이되며 평화를 뜻하는 '살람'에서 파생

 

이 책은 들어가며라는 복잡하고 다양한 이슬람 세계로의 여정에 대한 작가의 글을 제외하면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이슬람의 창시에서는 코란과 무슬림 공동체의 탄생에서 제국의 종교가 된 후 왕조의 생성과 분열을 통해 정치적, 문화적 현상에 대해 설명을 하고

 

2부 이슬람의 확장에서는 외세 침략과정과 아프리카, 아시아까지 이슬람의 확장 속에서 24년간의 여행을 통해 아랍 세계 밖의 이슬람에 관한 경험을 여행기를 작성한 이븐 바투타를 소개한다.

 

3부에서는 식민 지배시기를 살아가는 그들은 어떤 영향을 받았으며, 식민지 해방을 통해 민족주의, 서구와 이슬람의 정치 싸움을 통해 내부 혁명에 직면한 이슬람을 조명하였다.

 

1부 이슬람의 창시

 

1장 코란과 무슬림 공동체의 탄생

2장 우마미아 왕조와 제국의 종교가 된 이슬람

3장 다양한 종교와 문화의 용광로, 바그다드의 아바스 왕조

4장 세 칼리파국으로 분할된 이슬람 세계

 

코란 96장 1절~5절

읽어라 !

만물을 창조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그분께서는 응혈 한 방울로 인간을 창조하셨느니라.

읽어라!

그분께서는 붓으로 인간을 가르쳤으며 인간이 알지 못하는 것도 가르쳐주셨노라.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기도와 명상을 위해 메카 근처 히라 동굴에 은거하고 있을 때, 한 천사가 다가와 무함마드에게 읽으라고 명령했다. 무함마드는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지만, 천사가 껴안고 풀어주자 무함마드는 읽을 수 있었으며, 코란 96장의 첫 다섯 줄을 무함마드에게 계시했다. 이런 일화는 무함마드의 언행을 기록하고 전승한 하디스의 주요 선집 중 하나인 사히흐 무슬림에 등장한다.

하디스 선집은 9세기 중엽 이슬람 학자가 편찬했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무슬림 전승을 통해 무함마드 생전에 이미 코란의 각 장 필사본이 존재했고 이후 3대 칼리프인 우스만이 코란의 성문화 작업을 지시했으며, 이 판본은 우마미야 왕조 시대인 7세기 초에 완성되었다.

 

코란은 신의 말씀으로 여겨지며 코란에서 신은 자신을 일인칭 복수로 지칭한다.

코란에서 예언자는 무슬림들에게 신의 말씀을 전달하는 신의 사자이기 때문에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무함마드를 신의 예언자로 명명하고 그의 메카 설교 장면을 기록한 코란에서 무함마드의 이름은 설교를 하다가 메카 지배층으로부터 박해받는 장면, 메디나로 피신하는 장면, 결혼하는 장면, 무슬림 공동체 수장으로서 정치적이며 군사적인 투쟁을 하는 장면만 나온다.

 

코란은 연대기순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최초의 계시는 코란의 114개 수라트 중 96번째에 서술되어 있다.

 

코란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20여 년간 신에게 계시를 받고 그것을 주변에 전파하며 겪은 일련의 사건들을 기록한 책이다.

코란은 114개의 수라트, 6,236절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수라트의 길이는 3절에서 286절까지 매우 다양하다.

전승에 따르면 처음으로 계시된 수라트에는 메카 주민들이 알라를 경배하고 그가 인간에게 베푼 은총에 감사해야 한다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코란에는 무함마드 이전의 예언자들도 등장하는데 모든 예언자들의 언행은 비슷하다.

신에게서 받은 계시를 백성들에게 전파하고 유일신 알라를 섬기도록 하며, 타인에게 겸손하고 친절한 태도를 보이라 가르치고, 불공정하고 파렴치한 언행을 삼가라고 명한다. 

신의 경고를 듣지 않는 자들은 반드시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코란은 무함마드를 아브라함과 동일시하면서 무함마드에게 이교도를 물리칠 새로운 예언자라는 이미지를 부여하여, 같은 아브라함의 종교에서 출발한 기독교, 유대교와 비교해 이슬람의 존재감을 더욱 크게 부각한다.

 

예수 역시 코란에 등장하는 중요한 예언자 중 한 명이다.

하느님은 모세에게 토라를, 예수에게 복음서를 계시했다.

 

코란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예수를 죽였다고 주장했지만 실상 그들은 예수를 죽이지도, 십자가에 못 박지도 않았다.

코란에 등장하는 예수는 십자가에서 처형당해 죽은 것이 아니라 단지 그렇게 보였을 뿐이며,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예수가 아니라 그와 비슷한 형상이었다는 주장이 이어진다.

 

코란은 노예제 자체를 금지하기보다 노예제를 억제하고 명확한 규칙을 통해 노예제를 축소하는 방향을 제시했다.

코란에 명시된 여성의 지위에 관한 구절은 노예제에 관한 구절과 맥을 같이 한다.

여성이 도덕적 및 영적으로 남성과 동등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슬람 이전의 아랍 사회와 비교해 여성의 권리를 존중하면서도 여전히 가부장적 질서를 고수하였다.

 

성경에는 남자인 아담을 창조하고 아담의 갈비뼈 하나로 여성인 이브를 창조했다고 쓰여있다.

코란에는 여성을 먼저 창조하고 그 뒤에 남성을 창조했다고 쓰여있다.

코란 9장 71절 : 남자나 여자나 믿는 자들은 모두 서로가 서로를 위한 보호자들이니라.

코란 3장 195절 : 나는 남녀를 불문하고 너희가 행한 어떠한 일도 헛되지 않게 할 것이니라. 너희는 서로 동등하니라.

 

노예제와 마찬가지로 코란은 남녀차별의 악습을 단절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무함마드는 메디나에서 영적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군대를 통솔하는 최고 사령관이기도 했다.

코란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삼위일체에 관한 기독교 교리를 배척하고 유대인과 기독교인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교리를 비판한다.

코란은 신을 경외하는 선량한 사람이면 누구든 구원받는 자들의 공동체에 들어갈 수 있다고 설파한다.

코란 2장 256절 : 종교는 강요되어서는 아니 된다.

 

코란은 각 구절마다 최후의 날을 묘사하며 두려움을 준다.

 

무함마드 사후 그의 후계자 계승에 대한 논쟁은 내부 갈등의 시작이 되었다.

 

이슬람 초기 수십 년간 무함마드의 교우들과 그 후계자들이 구축한 새로운 권력은 무서운 속도로 확대되었다.

칼리프 우스만의 재위 중 코란의 성문화를 위해 코란 암송자였던 자이드 이븐 타빗에게 코란의 전체 텍스트를 기록하게 했다.

우스만은 코란의 표준화 작업에 착수하면서 이슬람 제국의 단일성과 제국의 지도자로서 자신의 권위를 확립하려 했다.

 

분열과 분쟁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시리아 총독이었던 무아위야 1세가 권력을 잡고 자신이 속한 우마이야 왕조를 세웠다.

 

예루살렘의 성전 터에 바위의 돔을 건축하여 무슬림들의 자긍심을 고취하고자 했다.

사원에 새겨진 코란 구절에는 신의 사자 또는 예언자로 불리는 무함마드의 이름이 5번 등장하는데, 이는 무슬림 공동체를 위해 하느님의 종교는 이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다.

 

바위의 돔을 세우고 4년이 지난 후 아브드 알 말리크는 이슬람 제국을 차별화하기 위해 중대하고 상징적인 결단으로 화폐 개혁을 단행한다.

또한 코란의 최종 정본을 완성하였으며, 아라비아어의 동형어나 동음이의어를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철자법 개혁을 단행한다.

이로써, 성서의 백성들에 속하는 유대인이 토라를, 기독교인이 복음서를 가졌다면, 무슬림들은 자신들만의 경전이 코란을 갖게 되었다.

 

우마이야 왕조 시대에 기독교인과 무슬림의 삶은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일상생활에서 서로 어울리며 살아갔다.

 

무슬림과 기독교인의 관계에서 언급되는 우마르 협정은 시리아의 우마르 1세가 기독교인과 체결한 협정으로 기독교인들은 일련의 제한 조치를 지켜야만 했다.

- 새로운 교회나 수도원의 건축 금지

- 무슬림이 아닌 아이들에게 코란 교육 금지

- 무슬림 복장이나 터번 착용 금지

- 무기 소지 금지 등이 그 내용이다.

-> 이러한 제한 조치는 기독교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제한하거나 금지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코란은 전쟁에 대해 이중적이다.

- 어떤 구절에서는 오직 평화로운 방법으로 신앙을 전파하라고 명한다.

- 다른 구절에서는 방어를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 또 어떤 구절에서는 이교도 적들을 무슬림의 힘으로 굴복시키기 위해 전쟁을 해야 한다는 호전적인 입장을 드러낸다.

무함마드 시대부터 초기 무슬림 공동체 내에서도 전쟁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음을 알 수 있다.

무함마드 사망 이후 하디스 선집을 바탕으로 이슬람 교리가 형성되고, 정복 전쟁으로 이슬람이 기독교나 유대교보다 우월하다는 차별화가 진행되면서 지하드의 개념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일부 하디스 편집자들은 무슬림과 비무슬림 간의 관계를 전투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 무함마드가 무슬림만을 위해 보내진 예언자가 아닌 전 세계 모두를 위해 보내진 예언자이므로, 이슬람의 영역을 확장하고 전 세계가 이슬람의 종주권을 인정할 때까지 지하드(하느님의 길을 가기 위한 투쟁)를 지속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8세기 전반 우마이야 왕조는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당시 이슬람 제국은 이슬람교로 통치하는 칼리프에 복속된 거대한 민족과 문화와 언어의 집합체였다.

이슬람 제국의 종교적이며 제국주의적인 사상은 화폐, 기념비적 건축물 등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프들은 이슬람의 진정한 창시자라고 평가한다.

이슬람의 핵심 요소로 인정되는 딤미 제도, 건축, 미술, 화폐에 적용된 이슬람 고유의 상징어가 우마이야 왕조에서 처음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아브라함의 종교와 다르며 훨씬 더 우월한 종교임을 나타내는 용어, '이슬람' 역시 우마이야 왕조의 이데올로기와 프로파간다의 산물이다.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프들은 대서양에서 히말라야 산맥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정복하고 제국을 이루어 오랜 기간 통치했다.

이런 우마이야 왕조의 업적이 없었더라면 이슬람은 지금처럼 많은 국가에 뿌리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우마이야 왕조는 이슬람의 변화를 꾀하며 성서의 백성들에 속하는 다른 종교를 압도하고 이슬람을 세계 최대의 종교로 부상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왕조의 권력 기반은 메카 출신의 아랍남성이었으며, 시리아 기독교인 아랍부족의 지원을 받는 가문 출신에 쏠려 있었다.

이러한 불공정한 대우는 비아랍인 이슬람 개종자들이 이슬람에 온전히 편입되지 못하게 하였으며 지속적인 반란의 불씨가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중심지였던 이라크와 이란에 기반을 둔 아바스 가문이 역성혁명을 일으키고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렸다.

아바스 왕조는 우마이야 가문을 철저히 숙청하였는데, 그중에 살아남은 칼리프 히샴의 손자인 아브드 알 라흐만 1세만 그의 어머니 부족인 베르베르족의 도움으로 이베리아 반도의 코르도바로 피신하여 후무마이야 왕조를 개창했다.

 

아바스 왕조가 설립되고 이슬람 세계의 무게 중심은 페르시아의 옛 영토인 동쪽으로 이동했다.

아바스 왕조 무슬림과 티베트 동맹군은 탈라스에서 중국의 당나라를 상대로 승리하고 중앙아시아로 진출했다.

이 전투에서 중국의 제지 기술자들을 포로로 잡아 제지술에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초대 칼리프 사후 알 만수르 시기에 무함마드의 친족인 아바스 가문이 사산 왕조 페르시아를 잇는 정당한 계승자라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구축했다.

만수르는 조로아스터교의 교리를 수용하였으며, 페르시아 수도 크테시폰에서 좀 떨어진 티그리스에 원형도시를 세웠으니 오늘날의 바그다드다.

그는 과학과 철학의 저술 번역 사업을 후원한 선대 정책을 이어나가며 번역 사업을 통치의 핵심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아랍어는 과학과 철학의 언어로 자리매김했다.

 

아바스 왕조 때 정립된 이슬람법에는 코란과 하디스를 근거로 한 이슬람 원칙과 아라비아를 비롯한 페르시아, 로마 기독교, 유대교의 관습과 전통이 융합되어 있었다. 

또한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큰 영향을 받은 이슬람 신학은 이 시기에 기독교 및 유대교 교리와 경쟁하고 대립하면서 발전해 갔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을 담은 하디스가 본격적으로 편찬되기 시작한 것도 아바스 왕조 때였다.

아바스 왕조 말기에도 무슬림은 기독교인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였고 두 종교 간의 상호 교류와 접촉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아바스 왕조가 종교적 논쟁과 정치적 갈등에 휩싸여 있을 때, 종파를 막론하고 일부 무슬림들은 이런 상황에 환멸을 느끼고 금욕과 기도를 통해 신과 하나가 되는 신비적 합일 체험을 추구했다. 

이런 신비주의 사상을 실천하는 이들을 일컬어 수피라고 한다.

이들은 바그다드 궁정의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비판하며 금욕적이고 청빈한 생활이야말로 무함마드와 그 동료들이 추구했던 이상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이슬람의 전통 율법을 존중하면서도 형식에 얽매이는 것을 거부했고 코란의 신비주의적 해석을 강조했다.

 

아바스 왕조 말기에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벌어졌으며, 알 무타심이 튀르크 노예 출신 용병을 중심으로 권력을 재편하면서 아바스 왕조의 권력구도는 근본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알 무타심 이후 튀르크 출신 장성들의 권세가 강해지면서 튀르크 군대는 왕조를 장악하면서 칼리프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아바스 왕조는 몽골의 침입으로 명맥이 끊겼다.

 

아바스 왕조의 몰락 전 이슬람 세계는 이베리아 반도의 코르도바 칼리파국, 이집트 카이로를 중심으로 한 파티마 칼리파국, 기존의 아바스 칼리파국으로 분열되었다.

이슬람 세계는 정치적으로 분열되었지만, 세 칼리파국 간에 인적, 물적, 사상적 교류는 계속 이어졌다.

코르도바, 카이로, 바그다드에서 실현된 종교와 문화의 공존은 때로 '실낙원'이나 '관용의 문화'로 표현된다.

관용과 공존의 이상이 실현된 시기였다.

 

 

2부 이슬람의 확장

 

5장 외세의 침략과 이슬람 세계의 재편

6장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

7장 아프리카부터 아시아까지 널리 퍼진 이슬람

 

11~13세기에 걸쳐 십자군 원정에 참전한 유럽 기독교인, 몽골족 등 여러 민족의 침략으로 이슬람 세계에 혼란이 가중되었다.

1258년 몽골군의 바그다드 침략으로 이슬람 세계는 본격적으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몽골족은 튀르크족과 마찬가지로 대거 이슬람으로 개종했고, 그 덕분에 이슬람이라는 종교는 중앙아시아와 인도까지 뻗어나갈 수 있었다.

 

이란 북부에 거주하던 셀주크 튀르크의 이슬람 개종으로 셀주크 튀르크는 이슬람 세계의 중심에 섰으며, 이들의 등장으로 서아시아 이슬람 세계에는 다양한 문화와 언어가 조화롭게 공존했다.

군과 행정분야에서는 튀르크어가, 궁정과 문화 분야에서는 페르시아어가 주로 사용되었고, 코란 강독과 예배에서는 신성한 언어로 여겨지던 아랍어가 사용되었다.

 

교황 우르바노 2세는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동방 교회들을 셀주크 튀르크족의 지배로부터 탈환해야 한다며 십자군 원정을 호소했다.

육로와 배로 유럽 각지에서 모여든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향했으며, 이 원정중 십자군은 라인란트에서 수천 명의 유대인을 학살했는데, 이는 종교적 광신과 탐욕으로 벌어진 유럽 최초의 유대인 박해였다.

십자군과 동방 기독교 왕국의 역사는 대개 식민 지배의 역사라는 틀 안에 갇혀있다.

야만적인 십자군의 역사는 특히 19세기 프랑스와 영국의 식민 지배 역사와 결합되어 더욱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11~15세기에 수많은 무슬림은 기독교 왕국의 치하에서 살아가야 했다.

기독교 사회에서 무슬림의 지위는 법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무데하르'라 불린 무슬림들은 노예, 자유농민, 수공업자 또는 왕실 군대의 용병이 될 수 있었고 대체로 이슬람 신앙을 지킬 권리를 보장받았다.

무슬림들은 각자의 뜻에 따라 개종할 수는 있었으나 오직 기독교로의 개종만 허용되었다.

 

십자군 전쟁은 살라딘의 아이유브 왕조 창건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지만 프랑크족 몰락의 원인이기도 했다.

살라딘 이후 아이유브 왕조 군사력의 핵심인 노예병사 맘루크들은 반란을 일으켜 자신들을 탄압하던 술탄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다.

노예 병사 맘루크들이 창건한 맘루크 왕조는 1250년부터 1517년까지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치하다 오스만 제국에 멸망했다.

맘루크 왕조는 프랑크족에 대항하며 창건된 왕조였지만 세력이 약해진 프랑크족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두려운 몽골족을 상대해야 했다.

 

이븐바투타는 이슬람 세계는 물론 이슬람 세계 밖의 아프리카, 인도, 중국등을 여행하며 여행기를 남겼다.

중국인들이 무슬림을 존중하는 것에 감동을 받기도 했지만 이단과 우상 숭배에 크게 실망하기도 했다.

이븐 바투다가 중국을 방문한 지 100년이 흐른 후, 명나라의 무슬림 장군 정화는 대함대를 이끌고 인도양을 휩쓸며 대항해를 시작했다.

정화의 함대는 7차례 원정을 통해 인도네시아, 인도, 아라비아 반도에서 외교와 경제 성과를 거두었다.

현재의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일부 섬에 이슬람을 전파한 것은 페르시아나 아라비아 반도에서 온 사람들이 아닌 중국인들이었다.

수피즘을 신봉했던 이븐 바투다는 힌두교인, 불교인, 기독교인을 막론하고 금욕적 생활을 하는 모든 이들을 존경하고 칭송했다.

 

오스만 제국은 15세기에서 18세기까지 지중해 지역의 패권을 장악했다.

특히 16세기에는 알제에서 페르시아만까지 세력을 넓히고 유럽 영토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중앙아시아 사파비 왕조와 인도양의 포르투갈에 맞서기 위해 오스만 제국은 신흥세력에 기댔는데, 황제 바부르가 건국한 무굴제국이었다.

중앙아시아를 관통하는 실크로드를 지배하고 있었던 무굴제국은 지정학적, 경제적 요충지였다.

바부르의 손자 악바르 대제는 현재의 인도북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아프가니스탄의 영토를 상당 부분 정복해 제국의 세력을 확장했다.

 

13세기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 해당하는 광대한 지역이던 말레이 제도에 인도 출신 무슬림 상인들이 이슬람을 전파하였다.

이슬람은 처음에 상인들과 항구 도시에 거주하는 주민들만 믿는 종교였으나, 후에는 왕들이 믿는 종교로 자리매김했다.

기도에 매진하며 금욕적인 삶을 사는 수피 수도자들의 모습이 자바 섬의 승려들에게 낯설지 않게 느껴진 덕분에 이슬람이 보다 쉽게 전파될 수 있었다.

 

 

3부 이슬람의 근대화

 

8장 식민 지배와 저항 운동

9장 식민지 해방, 민족주의, 그리고 정치적 이슬람의 대두

10장 개혁과 급진주의, 기로에 선 21세기의 무슬림

 

1833년 알제리 지식인 함단 호자는 <거울>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 유럽 식민 세력으로부터 억압받고 있는 알제리와 피식민 국가의 고통을 알리고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 지배를 규탄했다.

- 유럽 식민 세력이 그럴싸한 말치레를 늘어놓으며 자유와 보편적 가치를 찬양하면서도, 자신들이 건설한 식민지에서는 거리낌 없이 그 가치를 짓밟고 있다고 항변했다.

 

영국령 인도제국은 인도의 인프라에 막대한 투자를 했다.

제국 정부는 종교 지도자들과 지속적으로 협력하면서 종교법을 법제화했고, 종교법전을 편찬해 반포했다.

인도에서 식민 지배국에 저항했던 주요 세력은 종교를 기준으로 무슬림과 힌두교인이었지만, 인도 전체가 식민지에 불만을 품었던 것은 아니었다.

 

유럽 합스부르크 제국과 그 동맹국은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점차 잠식해 갔으며,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는 오스만 제국의 보호령으로 있던 타타르족의 크림 칸국 정복을 시작으로, 크림 반도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할양받았다.

오스만 제국이 최초로 무슬림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영토를 기독교 강대국에 내어준 사건이었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오스만의 지배하에 이집트를 통치하던 맘루크 군대를 격퇴하고 카이로와 나일강 삼각주까지 장악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지배하의 이집트를 동방 계몽주의의 교두보로 만들어 이집트의 진보와 학문의 발전을 돕고, 이를 통해 프랑스의 부와 명성을 쌓아 영국을 압도하려는 포부를 품고 있었다.

 

1801년 오스만 제국을 위협하는 새로운 적은 사우디 왕조였다.

사우드는 와하비즘 추종자들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이슬람 시아파의 성지를 습격하였다.

이들은 무슬림을 학살하고 시아파의 성지로 여겨지는 무함마드 손자가 묻힌 무덤을 파훼했다.

시아파와 수니파 모두의 성지를 파괴하는 행위는 곧 술타이자 칼리프를 모독하는 행위였다.

이 사건의 배경에는 이슬람 근본주의의 뿌리인 와하비즘이 있었다.

 

무함마드 이븐 압둘 알와하브는 시아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이라크 남부 바스라에서 수학했다.

이곳에서는 예언자 무함마드뿐 아니라 알리, 후세인, 그리고 그의 가족까지 숭배하는 종교적 관습이 있었다.

알와하브는 이런 관습은 우상을 숭배하는 '쉬르크'였기에, 아라비아 반도에 돌아온 후 유일신 신앙에 대한 설교와 저술활동을 병행했다.

그는 이슬람 초기부터 뿌리 깊게 이어져 내려온 모든 종교적 관습들을 배격했다.

특히, 무함마드의 교우나 가족의 무덤 또는 성인의 무덤에 참배하는 관습을 맹렬히 비판했다.

 

사우디 왕조는 가장 근본에 충실한 이슬람이라는 와하비즘을 표방하며 다른 이슬람 종파에 대한 지하드를 선언했다.

와하브파가 저지른 카르발라 학살은 오스만 제국의 쇠퇴를 재확인시켜주는 동시에 이슬람 전통 교파인 수니파와 시아파에 와하브파가 얼마나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와하브파는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앞세워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술탄의 통치 방식을 비판했다.

사우디 왕조가 메디나와 메카를 점령하자, 와하브파는 두 성지에 있는 이슬람 문화유산을 마구잡이로 파괴했다.

 

프랑스가 알제리를 강제 합병하면서 이슬람이 프랑스의 제2의 종교가 되었다.

프랑스는 19세기 내내 여러 지역을 식민지와 보호령으로 삼으며 제국을 건설해 갔고, 광활한 영토에서 다종교, 다인종 사회를 통치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프랑스의 이슬람과 무슬림에 대한 정책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슬람이 식민 지배 저항 세력의 구심점이 되는 것을 견제하면서도 이슬람 종교 지도자들을 회유하고 길들이려 했다.

 

19세기 격변 속에서도 무슬림과 기독교 사상가들과 작가들은 아랍 세계의 문화적, 지적 사조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이 아랍 문화 부흥 운동 '나흐다'이다.

 

아랍 문화 부흥 운동의 선구자적 역할을 한 인물 중 한 명인 자말 알 딘 알아프가니는

- 유럽의 식민 지배와 억압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이슬람을 개혁하고 아랍 사회의 독립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프랑스 히브리어 교수였던 에르네스트 르낭이 왜곡된 사상을 비판했다.

- 에르네스트 르낭은 이슬람은 과학 정신과 양립할 수 없으며 그 때문에 무슬림이 근대성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 이에 알아프가니는 이슬람은 다른 어떤 종교와 견주어도 과학에 걸림돌이 되는 종교가 아니라고 반박했다.

- 알아프가니는 종교란 본래 철학과 과학의 반대편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 아테네외 알렉산드리아는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였지만 기독교가 등장하면서 철학 정신이 소멸되고 말았다고 덧붙였다.

 

무함마드 압두

- 이성과 전통이 충돌한다면 이성이 우선되어야 하며 그것은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원칙이다.

- 언젠가 이슬람이 기독교를 뛰어넘어 더 널리 전파될지라도, 기족교와 이슬람 간에는 근본적으로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 서구 세계가 언젠가 기독교의 가치를 저버릴 것이라고 예견했다.

- "현재의 서구 문명과 기독교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신약성서는 기독교인들에 덧없는 현생을 초월해 헛된 명예에 집착하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 서구 문명은 다른 한편으로 권력과 명예와 사치와 오만과 위선의 문명이며 그 문명의 최상위 가치는 바로 돈이다."

 

영국과 프랑스에 독립을 약속받았던 아랍인들은 좌절감을 맛봐야 했다.

- 1916년 영국과 프랑스가 비밀리에 협정을 맺고 영국은 팔레스타인과 이라크를, 프랑스는 시리아와 레바논을 통치하기로 했다.

- 1917년 영국은 벨푸어 선언을 통해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서 민족적 고향을 건설하는 것을 지지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 유대국가를 만들려는 시오니스트들의 열망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면서 영국과 프랑스는 유대 자본을 전쟁 자금으로 유입시키고, 광대한 식민지를 연결하는 수에즈 운하를 불법 점유한다는 비난을 피해 갔다.

-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릴 목적으로 아랍인들의 독립 열망을 부추기며 온갖 수단을 동원했던 프랑스와 영국의 이중적 면모는 자주독립을 꿈꾸었던 아랍인들에게 큰 죄절감을 안겨주었다.

 

프랑스는 영국과 마찬가지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할 때는 아랍 민족주의를 부추겼고,

유럽 제국주의에 맞서 아랍 민족주의가 부상할 때는 이를 억압하거나 회피했다.

식민지 분열이 심해질수록 통치는 더 수월해지기 마련이었기에 영국과 프랑스는 식민지의 종교갈등을 조장했다.

영국은 인도에서 집단주의(무슬림, 힌두교도, 시크교도, 불교도, 자이나교도 등)를 지속적으로 부추겼는데, 이는 일부 종교 집단이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영국은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 이민자들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아랍인들의 독립의지를 꺾어버리기도 했다.

(영국은 유대인들이 세우고자 하는 국가의 성격이나 국경에 동의하지도 않았다.)

 

새로운 열강으로 등장한 미국은 아랍 국가들의 독립을 지지했다.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에 군사적 안보협력을,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에 석유 개발권과 판매권을 약속한 비밀회담을 가졌다.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와 전략적 동맹을 맺고 아랍 정부 중에서 가장 독재적인 사우디아라비아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전 세계에 와하비즘을 전파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집트의 이슬람화를 주장했던 사이드 쿠틉의 <코란의 그늘에서>

- 이슬람주의자들의 코란

- 이슬람 초기 네 명의 정통 칼리프들은 억압받는 백성들에게 사회 정의와 신의 진리를 보여주기 위해 부패한 비잔틴 제국과 사상 왕국에 대항해 지하드를 벌였다.

- 권력이란 공동체의 합의하에 생성되고 행사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 사우디아라비아의 군주제와 독재 체제를 지지하는 와하비즘과는 상반되는 사상이었다.

- 지하드를 다신교도 또는 이교도에 대항하기 위한 정당한 전쟁이라고 주장했다.

- 오직 신만이 신실한 무슬림이 복종하는 샤리아를 제정할 수 있으므로 법률을 제정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교도'라고 주장했다.

 

이란의 아야툴라 호메이니는 사이트 쿠틉을 존경했고, 그의 투쟁을 본받아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을 주도했다.

무슬림 형제단과 지하디스트에게 <코란의 그늘에서>는 일종의 필수 참고서였다.

 

이란 혁명

- 19세기말부터 영국과 소련은 이란의 경제, 정치, 군사 문제에 개입했다.

- 서방의 개입에 이란 국민들은 크게 반발했고, 친서방 정책을 펼치며 서구문물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나세르 알딘 샤 국왕은 암살당했다.

- 이란에 대한 내정간섭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영국과 러시아는 이란을 두 세력권으로 나누면서 이란의 주권을 제한했다.

 

- 1951년, 이란 의회는 영국이 독점 지배하고 있던 이란의 석유를 국유화하는 법안을 가결했다.

-> 미국과 영국의 정보기관은 이 법안을 주도한 모하마드 모사데크 총리 정부를 전복시키지 위한 쿠데타를 비밀에 조직했다.

->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가 미국과 긴밀하게 유착된 독재 정권을 수립했다.

 

-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은 호메이니의 이란 혁명 정권은 이슬람 공화국을 선포하고 '이슬람 율법'을 반포했다.

- 권력의 핵심은 호메이니가 장악했다.

- 호메니이 정권은 대중적이고 혁명적인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 교육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고 여성을 포함해 원하는 누구든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 시아파 국가인 이란이 혁명으로 군주제를 폐지하고 신정제 공화정을 세우면서, 세습군주제를 고수하는 수니파 국가 사우디아라비아와는 더욱 척을 지게 되었다.

 

모로코에서 인도네시아에 이르기까지 많은 국가의 지도자들은

- 국민들에게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슬람을 동원하거나

- 동맹을 찾기 위해 이슬람의 다양한 사조를 이용하거나

- 독재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자신을 극단주의 이슬람을 지지하는 최후의 보루로 내세웠다.

- 이란 이라크 전쟁은 수니파와 시아파의 종파 갈등으로만 해석할 수 없으며, 집권 세력은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전쟁을 이용했다.

 

20세기가 여러 아랍국가에서 이슬람주의를 표방한 정권이 탄생한 시기였다면

21세기는 이슬람의 다양한 비전과 정치가 대립하고 있는 시기라 할 수 있다.

이슬람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불의와 폭력에 맞서, 많은 무슬림들은 그들의 고유한 권리와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이란과 아랍 국가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이 세계 곳곳에 포진해 있는 반민주적 독재 세력에 의해 좌절된 것으로 민주주의와 인권의 후퇴를 불러왔다.

 

이슬람 세계의 주요 갈등 중 하나는 중동의 앙숙,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갈등이다.

1) 두 나라의 대립은 이슬람 냉전으로 규정할 수 있다.

 

2) 두 나라를 두고 시리아, 이라크, 레바논, 예맨 등 다른 국가들까지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동맹을 맺고 서로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역사학자는 이 분쟁이 680년 카르발라 전투 이후 이어져 온 수니파와 시아파의 대립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일차원적 분석이다.

 

3)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는 각각 이슬람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와 중동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국가의 전형을 보여준다.

와하비즘을 신봉하면서도 사치를 즐기고 부를 탐하며 위선적 행보를 보이는 사우디 왕가는 이란 혁명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19세기 중반부터 21세기 초, 이슬람 세계는 이슬람의 근대화가 화두로 떠올랐다.

이슬람을 근대화해야 할까?

아니면 세계를 이슬람화해야 할까?

 

- 베일 착용 문제에 관하여

1) 이슬람, 유대교, 기독교에서도 여성들은 정숙한 몸가짐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베일을 착용했다.

2) 여러 기독교 교부들은 여성이 기도할 때 베일로 모리를 가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3) 20세기 무슬림 여성들에게 베일을 착용하지 않는 것은 근대화와 해방을 의미했다.

 

4) 튀르키예 초대 대통령 케말 아타튀르크는 여성에게 베일을 착용하지 않을 것을 장려했다.

-> 대학과 행정직군에서 베일 착용을 금지했다.

-> 튀르키에 여성들은 프랑스보다 15년 앞서 1930년에 참정권을 얻었고, 1935년에 최초의 여성 의원들이 탄생했다.

 

5) 튀니지 초대 대통령 하비브 부르기바는 여성들의 참정권, 노동권, 부부간의 평등, 베일을 착용하지 않을 권리 등을 포함해 법적으로 평등권을 보장받을 수 있게 하였다.

 

6) 사우디아라비아는 2015년에 여성 참정권을 인정했고, 2017년에 여성의 자동차 운정을 허용하였다.

- 현재까지도 여성들은 전신을 가리는 베일을 착용해야 한다.

- 정부는 여성 인권 운동가들을 탄압하고 있다.

 

7) 이란 혁명 이후, 이란은 여성의 베일 착용을 의무화했다.

- 다만 이란 여성들은 베일 착용 의무를 저마다 다르게 해석하여 전신 차도르를 착용하는 여성, 스카프만 두르는 여성 등이 있다.

 

8)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여성이 베일을 착용하지 않고 인권을 주장하는 것은 이슬람의 가치를 저버리는 행위이자 서구를 모방하는 '부패'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9) 일부 무슬림 여성들은 성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의 일환으로 베일을 착용하지 않는다.

- 또 다른 무슬림 여성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베일을 착용할 권리를 주장한다.

-> 종교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도구로서, 성평등과 관계없는 종교적 관습으로 베일을 착용하고 있다.

 

아부 자이드 <이슬람의 각성을 촉구한다.>

- 코란을 혁신해야 한다.

- 시대에 맞게 비판적으로 코란을 해석함으로써 수많은 주해와 전승에 가려져 있는 코란을 영적인 시각에서 다시 읽어야 한다.

- 신학자와 법학자들의 코란 해석은 그들이 살았던 시대 상황과 그들의 당시 관심사 등을 고려하여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가말 알 반나 <이슬람, 자유, 그리고 세속주의>

1) 코란 대신 하디스를 내세우는 집단을 가차 없이 비판한다.

2) 비판하는 집단은 아바스 왕조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와하브파와 살라프파가 그런 것처럼 하디스를 꾸며내고, 거짓된 이스나드를 만들어내며, 거짓과 헛소리를 진리와 숭고함으로 둔갑시킨 하디스를 신성시하는 '죄악'을 저지른 모든 이를 말한다.

 

3) 순나(예언자 무함마드의 모범을 따르는 것)와 하디스(무함마드의 언행을 기록하고 전승한 것)는 절대 같은 것이 아니다.

- 순나는 기도하는 방식, 성지 순례하는 방식 등 예언자 무함마드가 보여준 삶의 방식이자 관습이다.

- 순나는 9세기에 편찬된 하디스와 아무 관련이 없다.

- 전 세계 모든 무슬림들은 순나를 본보기로 따른다.

 

4) 이슬람과 무슬림 사회에 해로운 영향을 끼치는 네 가지 하디스

- 배교자를 죽이라고 명령하는 하디스

: 코란에도 근거를 찾을 수 없다.

: 무함마드와 정통 칼리프 시대의 이슬람 정신에 완전히 위배된다.

: 무슬림 독재자가 공포를 조장하고 모든 반대파를 억압하는데 매유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 이슬람 사회의 진보와 지적 활동에 커다란 걸림돌이다.

 

- 쿠라이시 출신만이 이슬람의 정치 지도자가 될 수 있다.

: 독재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다.

 

- 여성에게 사업을 맡기는 민족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 여성을 사회 활동에서 배제하고, 여성들이 재능을 펼치지 못하게 하였다.

: 여성들을 억압해 권리를 박탈했다.

 

-왕이 너를 속이고 너의 돈을 훔쳐도 왕에게 복종하라

: 모든 저항, 심지어 비폭력적인 저항마저도 불법화하면서 독재권력을 공고히 하고 무슬림을 노예백성으로 만들어버린다.

 

=> 이것이 하디스 편찬자부터 와하브파, 살라브파에 이르기까지 '이슬람을 왜곡하는' 집단이 저지른 죄악이다.

 

" 이 집단은 무슬림에게 해가 되는 틀에 박힌 관습을 강요한다. 그들의 시선은 미래가 아닌 과거에 머물러 있다.

이 집단은 무슬림이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로 하는 모든 수단을 박탈해 도덕적, 직업적, 사회적 죽음을 선고했다."

 

프랑스 이슬람 신학자 오메로 마론지우 페리아 <이슬람의 문 다시 열기>

"이슬람 종교 지도자들은 신화적 역사에 갇혀있다. 오늘날 유대인 또는 기독교인 학자가 기독교나 유대교의 초창기에나 통용될 법한 담론을 늘어놓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그렇지만 무슬림들은 교조주의적 설교와 강연, 서적을 통해 예언자와 초기 무슬림 세대의 역사에 대한 장광설을 듣는 것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

 

압델와하브 메데브 <이슬람의 질병>

"분별력 있게 전승을 재해석하고, 허물어졌던 것을 복원하고, 예외를 규칙으로 정립하며, 종교를 시대 상황에 맞게 재정비하고, 관습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일단 이슬람 영토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4. 이 책을 읽고

 

이 책은 이슬람의 역사를 보여주는 책이다.

이슬람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대강의 내용을 보여주면서 과거부터 책이 발간되기 전까지의 역사적 흐름을 보여준다.

 

이슬람을 창시한 사람은 모함마드라는 것과 경전의 이름은 코란이라는 것은 대부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슬람의 탄생과 확장, 분열, 축소의 과정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세계사의 중동 역사를 통해 단편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슬람 속의 여러 단어가 의미하는 정의에 대해 알 수 있었고,

오랜 시간 사람의 손에 의해 정립된 종교는 항시 권력을 장악하려는 사람, 이익을 탐하는 사람에 의해 일반 대중이 이용당할 수밖에 없음을 본다.

 

종교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끊임없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던지는 질문에서 자신의 나아갈 방향을 알게 된다.

하나의 종교만이 아닌 다른 종교와 비교하고, 그 역사를 알아보고, 그 말이 맞는 말인지 알면 알수록 우리의 눈은 더 넓게 확장된다.

서로가 서로를 이단이라고 하는 현상은 지금도 있으며, 과거에도 있었다.

종교도 생존의 방식과 같은 과정을 거친다.

 

코란 경전에 대한 궁금증이 생긴다.

도대체 어떤 말이 쓰여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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