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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하는 인류 - 인구의 대 이동과 그들이 써 내려간 역동의 세계사

by 나노그램 2024.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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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이주민의 후손이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이주하고 생존을 위해 정주하고, 다시 생존을 위해 이주한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주하는 종이며, 지상에 사는 그 어떤 포유류보다 더 강한 이주 본능을 지니고 있다.

영구 거주라는 개념은 인류의 역사에서 최근에 일어난 현상이다.

이주라는 개념이 인류사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으며,

저자는 인류 이주의 역사를 들려줌으로써 우리가 오늘날 마주한 이주와 이민의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제안한다.

 

이주에 대한 광의적인 정의를 내린 심리학자 그레그 메디슨

: 이주민은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옮겨간 사람으로 그가 경험하는 두 번째 문화는 첫 번째 문화와 크게 다르며,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새로운 곳에 적응하는 도전 과정을 겪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기간 동안 머문다.

-> 국적, 민족, 국경에 대한 언급이 없다. 현대와 고대 이주민, 자발적으로 이주하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다.

-> 이주민들이 이동한 거리나 통과한 국경보다는 그들의 경험을 강조하고 있다.

 

1. 이 책의 발간 시기

 

초판 1쇄 발행 2023년 7월

초판 2쇄 발행 2023년 12월

 

2. 이 책의 저자

 

샘 밀러

 

런던에서 출생. 성인이 된 후 대부분의 시간을 인도에서 지냈다.

캠브리지 대학교에서 역사와 정치를 전공

BBC 뉴델리 특파원을 지냈으며, BBC 방송사의 남아시아 관련 시사프로그램의 제작에 참여했다.

 

작가의 역사인식을 알 수 있는 글 중 

: 역사책은 대체로 정주하는 사람들이 정주한 사람들을 위해 저술했으며 과거에 대한 특정한 관점을 제공했다.

민족주의에 관한 모든 토론에도 우리의 역사는 등장한다.

과거의 역사에 의문을 표하고 이의를 제기하고,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찾고, 그것들에 대해 말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3. 이 책의 구성

 

서문, 에필로그를 제외하고 전부 11장으로 구성되었다.

각 장이 끝나는 부분에 저자노트라는 제목으로 작가가 이 글을 쓴 배경과 생각 등을 써놓았다.

 

1장 네안데르탈인, 사피엔스, 비글호

 

1. 초기 인류는 수렵채집인이고 먹이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이동이 정상적이고 필요한 것이었다.

인류는 이 단계에 집을 만들지 않았고 동굴은 임시 혹은 계절적 피난처를 제공했을 뿐이다.

네안데르탈인 멸종 후 약 3만 년이 지나 농사를 짓기 전까지는 한 자리에 머물러서는 얻을 것이 없었다.

 

2. 육지 포유류 중 쥐를 제외하면 다른 어떤 동물도 온 지구를 돌아다니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뿌리 깊고 오랜, 본능적이고 혹은 유전적일 수도 있는 이동 욕구가 있지 않을까?

 

3. 유구한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한 곳에 머물며 생활하는 것은 비교적 현대적인 현상이며 400년 전만 하더라도 세계 인구의 3분의 1은 유목생활을 했다.

당시 사람들은 이동하는 지역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선사 시대의 이주는 아마도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했을 것이다. 

또한 이주에 엄청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4. 인류의 가장 긴 여행은 남아메리카 남단에 위치해 지금은 아르헨티나와 칠레 지역인 티에라 델 푸에고 군도로 가는 여정이었을 것이다.

인류가 그곳에 처음 도착한 것은 약 만년 전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1) 야간족이라 부르는 초기 이주민 집단이다.

2) 그들은 추위에 대한 강한 저항력을 키워 성공적으로 적응했다.

3) 조개를 채취하고, 물고기와 바다사자를 사냥하며 유목 생활을 했고 푸에고 군도의 집단들과만 섞였다.

4) 그들은 유목 생활에 대해 알려줄 풍부한 고고학 기록을 남겼다. 

5) 그들은 후손을 위해 고유 언어를 상세히 기록해 남겼다.

 

5. 찰스 다윈의 비글호가 그곳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들은 그들만의 문화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후 들어온 유럽인들은 선교사와 함께 질병과 무기를 들여왔다.

 

6. 우리는 모두 네안데르탈인과 약 1억 년 전 아프리카를 떠난 현대 인류의 후손들이다.

우리의 혈족관계는 순수 혈통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2장 바빌론, 성경, 아메리카 인디언

 

1. 우리는 문명의 요람 메소포타미아가 농업과 관계, 재산권과 도시, 왕궁과 신전, 글 쓰기와 통치자, 국경과 법, 세금과 군대의 출생지라고 배워왔다. 또 인류의 미래가 잉태된 곳이라고 배웠다.

 

1) 이것은 인류에게는 각자 속한 곳이 있다는 생각을 퍼뜨려 사람들을 길들였다고 볼 수 있다.

2) 실제로 이 역사관은 우리 조상들 중 일부가 지구의 작은 땅에 묶이게 됨을 의미한다.

3)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누구인지 정하는 정체성의 중심부를 이루게 되었으며, 우리는 이주민이 더 이상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2. 메소포타미아는 여러 면에서 중요하다.

 

1) 수렵채집인으로 시작해, 다음에는 농부 그리고 도시의 주민으로 인류가 처음으로 정착한 장소였다.

2) 사유재산 개념이 생겨났을 뿐만 아니라 여러 형태의 이주민들이 등장한 것도 이 때다.

 

3) 이주와 이주민들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보여주는 현존하는 서면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이 이때 나왔다.

- 기록된 이주민들은 강제로 이주된 이들도 있었고 자유의사로 이주한 이들도 있었다.

- 산에서 내려온 침략자, 전쟁에서 잡혀온 노예, 아프가니스탄에서 청금석을 가져오는 상인, 먼 곳으로 추방되었던 공동체 등이 포함되었다.

- 가장 큰 유랑민 집단은 계절에 따라 이동하며 가축을 키우는 목축 유목들이었다.

 

4) 메소포타미아 점토판에는 명확한 신분 계급이 있었고 정착민 아닌 사람들에 대한 강한 편견이 있었다.

- 도시 생활이 농업 활동보다 우월하고 농부가 되는 것이 유목민이 되는 것보다 낫다는 일반론이 퍼져 있었다.

 

5) 길가메시 서사시에도 비슷한 흐름이 나온다.

- 산에서 온 야성적인 남자가 도시에서 문명화되는 것은 메소포타미아 시대의 단골 주제다.

- 길가메시 서사시에는 권력, 폭정, 지혜, 피할 수 없는 죽음, 성 등 현대인의 흥미를 끌만한 주제가 많다.

- 길가메시 서사이에는 왜 우리가 집을 떠나고 싶어 하는지를 고찰함으로써 인간 조건에 대해 깊이 파고 들어간다.

 

6) 성경

- 여리고 성벽에서 환호하고 바빌론 강가에서 울부짖었던 이주민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는 고대 기록

-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고, 대홍수 이후 인구 재건에 나서고, 홍해를 건너 도피하는 등 성경 어디에나 이주민들을 찾아볼 수 있다.

- 성경은 이주 지침서로 읽어도 될 정도다.

- 성경은 이주민들에 의해 이주민들을 위해 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성경 구약 대부분은 바빌론 유폐 기간 또는 그 직후에 기록되고 편찬되었다.

- 바빌론은 최초의 거대한 인종 용광로였다.

- 타민족 간의 통혼도 많았는데, 일부 유대인들은 이에 대해 불만을 표했으며, 민족적 순수성에 문제가 생기는 것에 거부감을 느꼈다.

- 첫 유폐후 50년이 지나 유대인들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자 갈등은 더욱 극심해졌다.

- 유대인들은 이방인 아내와 그들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을 모두 추방하기로 합의했고, 이들은 집 없는 이주민이 되었고, 성경은 그들에 대해 더 이상 언급을 하지 않는다.

 

7) 유대인의 잃어버린 부족

- 앗시리아의 통치자 사르곤 2세가 기원전 720년에 2만 7,290명을 지금의 이스라엘 북부인 사마리아에서 유대인을 어떻게 끌고 갔는지 설명하는 설형 문자 서판이 남아 있다.

- 이러한 강제 이주 이야기는 사람들의 상상력을 사로잡는 전설로 이어졌으며, 영국, 마오리족, 아프리카계 미국인에서부터 일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공동체의 건국 신화로 사용되었다.

- 실제로 이 사건은 구약 성경에서 아주 간단하게 다루어졌다. 이스라엘에서 메소포타미아로의 대규모 유폐가 그것이다.

- 중세 이후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부족에 대한 집착을 발동시킨 것은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이었다.

- 성경의 내용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믿던 사람들에게 성경에 존재하지 않는 아메리카 대육은 위기를 불러일으켰다.

- 어떤 이들은 이를 증명하기 위해 성경을 샅샅이 뒤졌고 아메리카의 존재에 대한 암시라고 할 수 있는 모호한 구절들을 찾아 그 의미를 왜곡하기도 했다.

- 한 때는 영국인 역시 잃어버린 부족의 후손이라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 19세기에 나타난 이스라엘에 대한 집착은 북유럽 국가에서도 유사한 움직임이 있었는데, 이주 전설에 근거해 북유럽 백인 국가의 인종적 우월성을 입증하고자 했다.

- 잃어버린 부족이라고 주장하는 거의 대부분 민족이 사실은 그런 혈통과 관계가 없음으로 보여주는 DNA 데이터를 보여줘도 믿지 않는다.

 

8) 우리 모두가 다양한 선사시대의 부족의 후손으로 이동하고 타민족과 통혼하듯이 잃어버린 부족 또한 역사의 안갯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3장 페니키아인, 그리스인, 아리아인

 

1. 페니키아인들은 지중해 주변과 아프리카, 유럽의 대서양 연안 등에 수십 개의 정착지를 세웠다.

1) 페니키아인들은 서부 지중해와 그 너머로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주로 무역을 통해서였다.

 

2.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주 문제가 지배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1) 그리스인들이 이주에 대해 쓴 기록은 대부분 부정적이었고, 개인적인 이주민들은 흔히 비극적이거나, 불온하거나, 그리스인답지 못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2) 그리스인 세계관은 유목민을 받아들일 곳이 없었다.

3) 그리스인들은 정주생활을 하는 존재로 도시나 농촌에서 영주해 사는 것을 정상적이고 자연스럽고 영원한 인간 조건의 일부인 것처럼 서술했다.

4) 무역은 새로운 그리스 정착지를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5) 인구과잉, 가뭄, 기후 변화, 전쟁, 망명, 지루함과 호기심, 땅이나 권력이나 일자리를 찾아서 이주를 했으며, 노예, 추방자, 죄수, 전쟁 포로가 되어 강제로 이주당하기도 했다.

6) 정착민과 도시 거주자들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다.

- 정주하는 특정 집단이 지리적으로도 또 비유적으로도 세계의 중심에 살고 있다고 선언한다.

 

3. 아리아는 서양에서 변형된 아리안으로 잘 알려져 있다.

1) 아리안은 고대 작가들이 단순히 북인도의 지배적 문화와 사람들을 서술하기 위해 붙인 명칭이다.

2) 산스크리트 형용사로 사용하면 고귀하다는 의미다.

3) DNA 증거를 분석함에 따라, 인도-유럽어족의 근원은 우크라이나 동부, 러시아 남부 일부 및 카자흐스탄 서부를 포함해 일반적으로 러시아 대초원이라고 불리는 땅에서 고대 인구 이동이 있었다.

4) 실제로 최초의 인도-유럽어족으로 추정되는 러시아 대초원에 있던 사람들은 정착민이 아니라 이동 중인 유목민이었다.

 

4. 우리가 특정 장소에 속해 고대 셰계를 지어내려고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우리는 결국 유목민의 후손이다.

1) 우리의 근원을 찾고 싶다면 인류의 역사가 고대부터 지속되었다는 인간의 깊은 심리학 욕구를 충족시키고 싶다면 우리의 조상들이 아프리카에서 이주해 왔고, 아프리카 대륙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단 하나뿐인 진정한 본향이다.

 

4장 추방, 로마인과 반달족

 

1. 로마이야기는 트로이 왕자 아이네이아스의 불행한 방랑 생활로 시작된다.

1) 트로이 패망후 아이네이아스는 여정 끝에 이탈리아에 도착한다.

2) 그의 후손 로뮬루스가 로마를 세운다.

3) 로마가 오지 너머까지 정복하여 세력이 커지면서 로마는 일개 도시가 아니라 제국의 수도, 문명의 본보기, 군사적, 종교적 권세의 원천이 되었다.

4) 로마는 모든 도시국가를 통합하는 이름이 되었다.

5) 사도 바울은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태어난 로마 시민이었으며 로마에서 네로 황제의 명령으로 처형당했다.

6) 로마인들에게 십자가 처형은 노예나 야만인들이나 받는 잔인한 처형 방식이기에, 바울은 로마법에 따라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없었다.

 

2. 반달족은 로마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1) 야만인이라는 개념은 복잡한 개념이다.

2) 야만인

- 원래 그리스어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를 묘사하는 의성어다.

- 초기 그리스 작가들은 말은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람들을 묘사하기 위해 가치중립적인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했다.

- 후기 그리스에서는 야만성과 어리석음을 함축하는 부정적인 용어가 되었다.

- 로마에서 야만인이라는 단어는 대부분의 경우 로마인의 반대말이 되었다.

3) 야만인에 대한 로마의 기록

- 아리아들은 전쟁광

- 아일랜드인들은 문한했으며

- 에티오피아인들은 교활하고 겁쟁이라고 묘사되었다.

4) 고트족과 반달족은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5) 반달족은 현대 유럽어에서 '공공시설이나 문화 파괴'를 의미하는 단어 및 그와 유사한 용어들을 탄생시켰다.

- 반달리즘 : 공공시설이나 기물 파괴 행위를 의미

* 실제로 반달족이 로마를 침략했을 때 파괴와 약탈행위가 심하게 자행되지는 않았다.

* 중세 기독교 교리체계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아우구스티누스는 북아프리카 주교로 있을 때 반달족의 침공을 겪었는데, 이 일은 반달족에 대한 적대적 인식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3. 새로운 이주민의 등장은 로마와 그 이후의 기록을 통해 유럽에서 새로운 대격변이 시작되었음을 시사한다.

- 아시아에서 온 훈족의 이동은 도미노 효과를 일으켜 대록의 모든 지역과 북아프리카에 영향을 미쳤다.

 

5장 아랍인, 바이킹, 영국인의 조상

 

<아랍인>

 

1. 일부 어원학자들은 '아랍'이라는 단어가 원래 '유목민'을 뜻했으며, 공동체적 이동 생활 방식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1) 메소포타미아인이 아랍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기록된 기원전 853년 당시에는 대부분의 아랍인들이 유목민이었기 때문이다.

2) '아랍'이라는 단어와 관련하여 초기에 언급된 이들 대부분은 낙타를 타고 다니는 유목민 전사 혹은 상인이었다.

3) 이슬람 이전 아랍인의 정체성은 방랑 혹은 다양한 종류의 이주 문화를 중심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그 형태는 유목목축업과 장거리 교역 및 약탈로 나타났다.

4) 이름 없는 아랍인의 말 : 우리는 땅을 소유하지만 땅이 우리를 소유하게 하지 않는다. 우리는 성벽으로 우리를 방어할 필요가 없다.

 

2. 이슬람의 부상은 정착주의와 도시주의의 승리로 설명될 수 있다.

1) 유목민과 상인들이 결국 집주인과 궁전의 거주자가 되었다.

2) 메카 내부에서 형성된 최초의 무슬림 공동체는 기독교 통치자의 보호 아래 일시적으로 아프리카에서 정착한 소수의 이주민들이었다.

3) 이슬람 시대는 계속해서 더 많이 이주하고 더 많이 정복하면서 이어진다.

4) 이슬람의 성공은 새로운 제국의 국경과 그 너머까지 이동한 군인, 행정가, 설교자 등 이주민들이 큰 역할을 했다.

 

3. 이슬람교와 초기 기독교 비교

1) 두 종교 모두 신학체계와 실천에 있어서 이동성이 아주 높아, 이주성 종교라 할 수 있다.

2) 두 종교 모두 특정 영토나 민족 집단에 얽매이지 않았다.

3) 두 종교 창시자들의 소소한 이주 이야기들이 삶의 상당 부분 차지했다.

- 예수는 이동 중 말구유에서 태어나 베들레헴에서는 집 없는 이주민이었고, 이집트에서는 난민이었다.

- 무함마드는 박해를 피해 메디나로 이주했다.

4) 양쪽 모두 추종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 여기저기 옮겨 다닐 것을 권장했다.

5) 초기 기독교도와 무슬림은 신앙에 합류한 이방인을 환영했다.

6) 두 종교 모두 노예였던 사람들을 환영하도록 했다.

7) 두 종교 모두 원칙적으로 서로 다른 인종 및 언어집단 간의 통혼을 인정했다.

 

4. 두 종교사이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을 만든 것은 이슬람의 초기 성장 속도였다.

1) 초기 무슬림 이주는 복음 전파 외에 부와 권력, 토지 또는 모험을 찾아 이동이었다.

 

<바이킹>

 

1. 바이킹에 대한 고정관념은 대개 바이킹 이주의 규모와 범위를 폄하하는 방향으로 이어진다.

1) 바이킹에 대한 긍정적인 견해는

- 그들은 자유롭고, 두려움이 없다.

- 뛰어난 결단력과 독창성, 모험성을 가진 것으로 그린다.

2)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에게 있어 바이킹은 이주를 위해 떠나간 사람들이다.

 

2. 바이킹이 이동을 하게 된 동기는 고국의 인구 과잉이 한 가지 중요한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1) 첫 번째 경로인 대서양 횡단 항해에서 1,000년 초기에 지금의 캐나다 해안에 도달했다.

- 콜럼버스와 500년 앞서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했다.

2) 바이킹의 대서양 횡단 이주는 호기심, 명성, 새로운 땅에 대한 열망이 더 작용한 듯하다.

3) 캐나다 이주는 실패했다. (원주민의 저항이 원인)

4) 캐나다 이주는 실패했지만,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 이주는 오래 지속되었다.

5) 스웨덴 출신 바이킹들은 발트해를 통해 동쪽으로 이주했고, 러시아를 통해 남쪽으로 향했다.

- 이들은 동쪽으로 이주한 뒤 새로운 땅을 탐험하지 않았다.

6) 영국으로 간 최초의 바이킹들은 이주민이 아니라 약탈자, 살인자, 해적, 도둑으로 바이킹에 대한 영어권의 전통적인 고정관념에 가장 가까웠다.

7) 바이킹들은 널리 퍼졌고 왕족이 되었다.

8) 바이킹과 그 후손은 중세 귀족의 중심부가 되어 여왕이 외국인인 경우가 흔하였고, 왕이 외국인인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9) 바이킹과 그 후손들의 군사적 능력이 성공의 주요한 이유였지만, 현지와 적극적으로 동화한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

 

3. 바이킹들은 이주했던 과거를 자랑스러워했고, 고대 북부 이교도 뿌리에 대한 이야기를 궁정에 남겨 두었다.

1) 12세기 앵글로-노르만계 수도사 오데릭 비탈리스

- 노르만인들은 천성적으로 호전적이고 대담하여 길들여지지 않은 인종이라 묘사했다.

- 노르만이라는 단어가 '북쪽 사람'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 노르만의 기원에 트로이 목마이야기를 접목시켜 훨씬 더 오래된 혈통을 추가한다.

2) 상상으로 만들어진 트로이 조상들이 기존 왕실에 편입되는데, 이는 당시에 상투적으로 이루어지던 수법으로 새로운 통치자가 신화적 이주민의 후손임을 선언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3) 베르길리우스 이후 트로이 전설에 덧붙여진 이야기들은 국가 건설과 왕족들의 정당성 확보에 활용되었다.

- 이것을 통해 새로운 통치자와 왕족들은 로마 제국의 통치자들과 조상을 공유하게 할 수 있었다.

4) 더 많은 트로이인들이 다른 민족의 창시자로 지칭되거나 날조되었다.

 

<영국인의 조상>

 

1. 트로이의 부르투스 신화가 영국인의 조상이 이스라엘 부족이라는 황당한 이야기와 동급으로 취급되어 소수의 괴짜나 공상가들 사이에서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2. 브리튼은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지리적 또는 정치적 실체가 없다.

3. 브리튼이라는 단어는 시대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진다.

4. 마르세유의 피테아스의 저서에 처음 등장했다.

- 유럽 북서쪽 해안에 있는 두 개의 큰 섬을 포함하는 지역을 일컫는다.

5. 브리티시라는 단어는 제국이나 근위병, 항공사, 여권 또는 정부 앞에 서술어로 널리 사용되나 대부분의 경우 유나이티드 킹덤의 형용사로 사용된다.

 

6장 제노바, 콜럼버스, 타이노

 

1. 항구 도시 제노바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출생지다.

1) 콜럼버스가 출생한 집은 1892년 그의 첫 대서양 횡단 항해 4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의 일환으로 선정되었을 뿐이다.

2. 제노바 가짜 유물

1) 콜럼버스 집과 내부 내용물

2) 중세 대성당의 지하 납골당에 세례 요한과 유물

3) 세례 요한의 머리를 얹어 살로메에게 바쳤다는 쟁반

4) 예수가 못 박힌 나무 십자가의 조각

5) 성모 마리아의 머리카락 몇 가닥

6) 최후 만찬에 사용되었던 육각형의 녹색 대접인 성배

 

2. 제노바는 야누스라는 또 다른 트로이 이주민에 의해 설립되었다고 전해진다.

3. 제노바의 식민지와 정착지들은 모국과 서로 다른 관계를 갖고 있었고, 고대 그리스의 느슨한 식민지 모델에 가까웠다.

- 군주나 제노바 명망가의 통치를 받았으나 상당한 독립성을 갖고 있었다.

 

4. 콜럼버스

1) 그는 단순한 이주민 이상으로 해상 유목민이었다.

2) 대담하고 고집스러웠으며 재능 있는 항해사였다.

3) 유럽에서 서쪽을 향해 아시아로 항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4) 콜럼버스가 최초로 상륙한 지점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5) 콜럼버스의 처음 목적은 무역과 탐사, 외국 통치자들과의 만남이었으나 곧 정착과 착취로 변질되었다.

6) 그가 유럽으로 보내는 주요 상품은 금, 면화, 유향수지와 노예였다.

 

5. 유럽인이 도착하기 전까지 타이노족이 살고 있던 쿠바, 자메이카, 푸에르토리코는 파괴되었다.

- 천연두가 가장 큰 이유였다.

 

6. 타이노족은 원래 아프리카에서 온 이주민이었다.

7. 타이노 운동을 현대 정체성 정치의 사례로 볼 수 있다.

1) 정체성에 대한 선택권은 더 이상 과학자, 학자, 정부에 있지 않으며, 당사자인 개인과 집단에게 주어지고 있다.

2) 스스로를 누구라고 설명할지에 대한 권한은 자신이 갖게 된다는 것은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 우리를 자유롭게도 하지만, 자기편을 선택해야 하고, 자신을 단순한 한마디로 정의해야 하는 부담을 주기도 한다.

- 단 하나의 정체성을 고집하는 것은 때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삶을 상상하고 공감하는 능력을 감소시킬 수 있다.

 

8. 유럽에서 흑사병이 발생했을 때는 수천 명의 유대인이 살해되었다.

1) 간단산 형용사로 외국인들을 악마화하고 오명을 씌우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2) 이탈리아와 독일 사람들에게 매독이 '프랑스병'이지만, 프랑스인에게는 '나폴리병'이고, 러시아인에게는 '폴란드병'이었다.

3) 스페인 독감은 스페인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데도 그렇게 불렸다.

 

7장 버지니아, 노예, 메일플라워호

 

1. 유럽인과 아프리카인이 완전히 다른 상황에서 아메리카에 정착한다.

1) 유럽인에게는 자유주의, 희망, 꿈, 독립이었다면, 아프리카인에게는 노예제, 불의, 악몽, 억압이었다.

2) 미국 건국에 기여한 대부분은 노예 소유주다.

- 상당수의 카우보이들은 흑인이었다.

- 일부 아메리카 원주민은 노예였으며, 일부는 노예 소유주였다.

3) 아메리카 대륙 노예제도는 유럽인이 상륙하기 전 원주민 집단에서도 존재했다.

- 대개는 전쟁포로였으며, 피부색에 대한 차별은 없었다.

- 몸값을 받기는 했지만, 물건처럼 사고팔지는 않았다.

 

2. 메이플라워호의 진실

1)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사람은 영국 출신이다.

2) 네덜란드 라이덴에서 10년 이상을 거주한 사람이다.

3) 배에 탄 대다수는 청교도가 아니었다.

4) 이들이 정착한 곳은 뉴잉글랜드다.

- 원래는 버지니아로 갈 계획이었다.

- 뉴잉글랜드는 유럽인이 가져온 질병으로 주민을 철수시킨 곳이었다.

5) 필그람 파더즈는 추수감사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적이 없다.

- 1863년이 되어서야 국경일이 되었다.

-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추수감사절을 애도의 날로 표시한다.

6) 메이플라워호보다 13년 빠른 1607년에 도착한 유럽인이 세운 아메리카 대륙 최초 영국인 정착지인 버지니아 제임스타운 이야기는 메이플라워호 이야기에 가려져버렸다.

- 초기 버지니아이야기는 전반적으로 어수선하고

- 이념적이거나 종교적인 중심 맥락이 부족했으며

- 원주민과 갈등, 아프리카 노예제도 등 어두운 이야기이며

- 내세울만한 영웅이 없고

- 메이플라워호와 추수감사절 같은 상징적인 이미지도 없었다.

7) 초기 정착지인 제임스타운

- 중요한 기술도 응집력도 공동의 목적도 없었다.

- 여성이 거의 없어 가정 생성이 어려웠다.

- 식량 부족하였으며, 지휘체계가 엉망이었다.

- 일부 젊은이는 인근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에 합류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3. 포카혼타스 이야기

1) 원주민에서 온 이주민의 유일한 예이다.

2) 서로 다른 목적을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래되었다.

3) 디즈니 영화

- 자연사랑, 인종차별주의 반대, 평화를 사랑하는 여성 운동가로 그려졌다.

- 식민지 역사를 은폐했다고 비난받았다.

- 가장 큰 오류는 존 스미스와 포카혼타스의 관계로 이들 사이에는 로맨스가 없다.

- 존 롤프와 결혼, 아들의 탄생 및 때 이른 사망을 포함한 많은 것이 디즈니 영화에서 누락되었다.

4) 존 스미스 영국 정착민이 인디언에 사로잡혔을 때 포카혼타스의 중재로 살아날 수 있었다.

5) 10대 소녀가 된 포카혼타스가 영국인에 의해 납치되었다.

6) 갇혀있는 동안 기독교로 개종, 레베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담배 농장을 운영하던 존 롤프와 결혼한다.

7) 인종차별적 이야기에서 포카혼타스는 초기 영국 정착민과 원주민 사이의 이상적인 연결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4. 1750년 버지니아 식민지 인구 25만 명 중 절반이 아프리카 출신 노예였다.

1) 많은 유럽인이 니코틴에 중독되었다.

2) 그 중독을 만족시켜 줄 담배 농장을 운영하였다.

3) 농장을 운영하기 위한 수만 명의 이주 노동자가 필요했다.

4) 이주한 가난한 유럽인은 인권을 주장할 수 있고, 때론 반항도 가능하며,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 고향으로 돌아갔다.

5) 이러한 이유로 인권이 없으며, 자유가 없으며, 반항 불가하며, 경제적 여유가 생길 수 없는 아프리카 노예들을 들여왔다.

- 아프리카인들은 강제로 노예가 되어 대양을 건너 이송되었다.

- 그들의 생각과 행동의 원천인 문화마저 뿌리 뽑혔다.

- 이름, 언어, 역사, 신, 음식, 음악 등 모든 것을 빼앗겼다.

 

5. 국제 노예무역이 폐지되었음에도 노예제 자체는 미국의 경제, 사회제도에 계속 영향을 미쳤다.

1) 노예 가격이 치솟자 불법으로 들여오는 경우가 생겼다.

2) 불법 유통이 발각되지 않게 낙인을 찍지 않았다. 

- 벌거벗은 채로 이송되었다.

 

6. 노예제도와 이주

1) 노예는 이주민이 아니다.

- 이주에는 선택이 개입되어 있어야 한다.

- 노예는 그 문제에 대한 결정권이 없었다.

 

2) 이주민에 대한 정의

: 이주민은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옮겨간 사람으로 그가 경험하는 두 번째 문화는 첫 번째 문화와 크게 다르며,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새로운 곳에 적응하는 도전과정을 겪기에 충분한 기간 동안 머문다.

- 이 정의는 선택이나 자유의지를 다루지 않는다.

- 이주를 정의할 때 발생하는 또 다른 중요한 쟁점은 거리다.

- 이주론으로 유명한 19세기 지리학자 라벤슈타인

 : 이주민 중 여자의 비율이 남자보다 더 높다.

- 이주는 매우 복잡한 개념으로 명확한 경계가 있는 깔끔하고 단순한 정의에 맞춰지지 않는다.

 

3) 이주가 강제와 비강제 또는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경우를 포함한 인간 경험의 핵심이다.

 

4)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

- 만물은 유동적이다.

- 멈추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이 보편적인 규범이며 인간의 행동 양식에서도 정주보다는 이주가 정상이다.

 

7. 역사는 우리의 살아있는 일부이며, 학교나 박물관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을 훨씬 넘어선다.

1) 역사는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근원이기 때문에 묻어버려서는 안 된다.

2) 과거의 역사에 의문을 표하고, 이의를 제기하고,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찾고, 그것들에 대해 말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3) 역사책은 대체로 정주한 사람들이 정주한 사람들을 위해 저술했으며 과거에 대한 특정한 관점을 제공한다.

4) 저자의 프로젝트는 흔적을 남기지 않았고, 이름조차 남아있지 않은 수백만명의 이주민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리는데서 시작한다.

 

 

8장 황인종, 차이나타운, 푸 만추

 

1. 프아수아 베르니에 - 프랑스 의사

1) 최초의 인종차별주의자

 

2) 지구에 거주하는 인간들의 종 혹은 인종에 따른 지구의 새로운 분류

- 첫 번째 인종 : 아메리카, 유럽 , 중동을 거쳐 아시아 깊숙한 곳까지 있는 사람들

- 두 번째 인종 : 아프리카 흑인

- 세 번째 인종 : '진짜 백인'이라고 표현한 극동 아시아인

- 네 번째 인종 : 북부 스칸디나비아의 라프족

 

3) 유럽 출신 사람들이 최상위, 더 세분화한 유럽인들은 본인들에게 더욱 우월한 지위를 부여했다.

4) 이 세계관은 시간이 정지된 세계, 동적이기보다는 정적인 세계, 정주하는 것이 정상인 세계, 모든 사람이 일정한 인종 집단에 속하는 세계에 기반을 두고 있다.

5) 유목민이나 '혼혈'같이 단일 범주에 들어맞지 않는 사람들을 악마화하여, 타 인종 간 결합에 낙인을 찍고 우리의 공동 유산을 부정한다.

 

2. 칼 린네

1) 스웨덴 생물학자

2) 린네 분류법 : 계(동물), 강(포유류), 목(영장류), 속(호모), 종(사피엔스)

- 현명한 사람이라는 의미의 라틴어 '호모 사피엔스'를 만들어냈다.

3) 호모 사피엔스 속을 아메리카(원주민), 유럽인, 아시아인, 아프리카인으로 분류했다.

4) 아시아인은 천성적으로 오만하고 탐욕스럽고, 아프리카인은 교활하고 나태하며, 유럽인은 온화하고 창의적이라고 기술했다.

5) 린네가 분류한 동아시아인의 황인종론

- 린네와 그 후계자들은 황색을 고수했다.

6) 린테의 최대 라이벌 프랑스 생물하가 뷔퐁

- 유럽의 백인, 아프리카의 흑인, 아시아의 황인, 미국의 적색인으로 분류했다.

 

3. 차이나타운

1) 중국인의 각 대륙, 나라로 이주

2) 노동력 부족을 채울 수 있는 대안

3) 황색위협

- 피해망상과 극심한 불안감까지 불러일으키는 동아시아인 이주에 대한 우려를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 1890년대에 처음 언급

-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자신이 유럽 국가 원수들에게 보낸 석판화의 제목으로 그 문구를 만들어냈다고 주장했다.

- 유럽의 식민 열강들에게 '황인종의 침입'에 저항하기 위해 연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중국을 분할해 자신들의 제국으로 통합시켜야 한다고 부추기기도 했다.

4. 영국의 푸 만추 소설

1) 영어권 국가에서 영화, TV시리즈, 연재만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인기

2) 아편굴, 동양의 신비, 비밀 결사, 범죄 천재, 은밀한 독약, 악마적 잔인성, 최면술 등 중국인들에 대한 거의 모든 고정관념을 볼 수 있다.

3) 책 전반에 걸쳐 중국인들의 황색스러움에 대한 표현을 볼 수 있다.

 

4. 저자노트, 여덟 번째

1) 여권은 각 민족과 국가들 사이의 깊고 근절한 수 없는 불평등을 상징하게 되었다.

2) 여권지수에서 최하위에 가까운 나라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3) 모든 여권이 동등하거나 더 이상 여권이 필요하지 않은 세상은 거의 상상조차 불가능하다.

4) 비엔나 출신의 소설가 쉬테판 츠바이크는 자서전에서 4쪽 반에 달하는 귀중한 지면을 여권을 비난하는데 할애했다.

- 그는 여권을 증오했다.

-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가 겪은 끔찍한 고통을 이보다 더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은 없다.

5) 여권이라는 용어는 원래 프랑스어로 도시 성문의 출입을 허가하는 문서였다.

- 이 당시 여권은 일반적으로 소지자를 위해 한 나라 정부가 다른 나라 정부에게 쓴 한 장짜리 소개 편지 형태였다.

- 제1차 세계대전 중 유럽은 강박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각국 정부는 효과가 없었지만 인구 이동을 통제하고 싶어 했다.

- 이에 따라 여권이 발급되었고 국경에서 검사를 했으며 때로는 국내에서도 검사를 했다.

6) 여권과 여권이 상징하는 불평등은 여전히 이민 이야기의 중심으로 남아있다.

 

9장 시오니스트, 난민, 숙모할머니 폴리

 

1. 시온주의 

1) 대규모 이주를 통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들의 나라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는 운동과 이념을 설명하기 위해 1890년대에 만들어졌다.

2) 서기 70년 로마제국에 의해 유대인들이 추방되고 노예가 된 이후 거의 2천 년 동안 귀향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3) 해외에 있는 유대인들은 자주 약속의 땅인 팔레스탄인으로의 귀환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실제로 행동을 취한 이들은 거의 없었다.

4) 유대인 사이에서 팔레스타인은 사실상 불모지나 다름없었고, 지금은 다른 사람들의 소유이기 때문에 귀향이라는 개념은 마음을 위로하는 환상이며 비현실적인 희망일 뿐이었다.

5) 19세기 후반에 유대인들이 이주할 고국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을 때, 팔레스타인이 최우선 순위에 오르지도 않았다.

- 이주를 선택하게 된 이유 또한 유대인의 역사나 유대교 전통과는 관련이 없었다.

6) 러시아 혁명 당시 지토미르에서 경험한 시온주의는 유럽의 역사적 상황과 관련이 있었다.

- 부분적으로 동유럽의 유대인 학살과 유럽 다른 지역에서 유대인에 대한 지속적인 차별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자기 보호적이고 방어적인 대응이었다.

7) 시온주의는 유럽 전역에서 민족주의 감정이 고조되던 시기에 유대인들도 독립의 꿈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기도 했다.

- 유럽에서 민족주의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거나 같은 종교를 믿거나 같은 존통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주권을 가진 민족으로 국가를 결성할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의미했다.

 

8) 알리야

- 히브리어로 원래는 언덕을 올라간다는 의미

- 유대교 회당에서 어떤 사람이 토라가 보관되어 있는 곳으로 '올라간다'는 뜻

- 19세기가 되어 알리야는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도 의미하게 되었다.

- 1920년대에는 구체적인 이념적 함축성을 갖게 되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는 유대인은 이주를 통해 애국 행위를 하거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느끼게 되었다.

 

9) 하기라

- 후에 유대인이 이기적인 이유로 이주한다는 의미를 갖거나, 유대인 아닌 이주민들의 이주를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

 

10) 1차와 2차 알리야 이야기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던 유대인 중 대다수는 그곳에 정착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다른 나라나 예전에 살던 곳으로 돌아갔다.

11) 실제로 시온주의에 대한 헌신으로 결속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대학살과 내전을 피해 도망치는 경우가 많았다.

 

12) 예리다

- 팔레스타인을 떠나게 되는 유대인의 행동을 표현하는 히브리어 단어

- '내려가다'라는 뜻으로 알리야의 정반대 의미이며, 약속의 땅에서 이주해 나간다는 뜻이다.

- 이스라엘에서 이 단어는 배교와 반역이 기저에 깔려 있는 실망감을 내포하는 아주 부적정 의미가 되었다.

 

13) 이스라엘 록 그룹 쉬메멜의 히브리어 노래 '베를린'은 예리다를 찬양한다.

- 우리 솔직해집시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시온주의를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죽고 싶지 않아서 도망쳤습니다.

심지어 우리의 야곱도 이집트로 '내려갔습니다.'

그곳의 집세는 3분의 1이고 월급은 두 배였습니다.

 

2. 난민

1) 피난처나 안전한 곳을 찾는다는 일반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으며, 동시에 특정 민족국가에 소속되지 못해 비정상이 된 사람들을 지칭하는 의미도 갖게 되었다.

2) 난민이라는 단어가 영어에서 처음 사용된 것은 17세기로, 영국 또는 다른 지역으로 도피한 박해받는 프랑스 신교도를 의미하는 프랑스어 '레피제'에서 차용되었다.

3) 오늘날 난민의 정의

- 여전히 박해를 받을 수 있다고 인정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는 두려움에 근거한다.

- 가난, 기아, 기후변화 또는 자연재해 때문에 고국을 떠나는 이주민은 난민으로 간주되지 않으므로 보호를 받기 힘들다.

 

3. 우리 대부분은 아프리카에서 온 이주민의 후손이다.

1) 유럽인들은 수빅만 명의 아프리카인들을 강제로 납치하여 노예로 만들었다.

2) 아프리카 대륙을 자기들 마음대로 나눠 가진 과거를 가지고 있다.

3) 이러한 역사적 경험들이 유럽인들을 조금이라도 겸손하게 할 수는 없는 걸까?

- 그들이 아프리카 이주민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합리적인 척하며 "당신은 유럽에 올 수 없습니다."라고 말할 때 약간의 가책이라도 느낄 수 있도록.

 

4. 국외 거주자와 이주 노동자의 차이점은 무엇?

1) 국외거주자는 부유하고 백인인 경우가 많다는 대답을 하면서도 비난을 피하기 위해 일련의 언어 곡예를 펼치며 설명을 늘어놓는다.

2) 국외 거주자를 설명하는 그 모든 대답이 분명 타당할 테지만 그중 어느 것도 그들을 이주 노동자보다 더 낫다고 주장하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3) 국외거주자도 뒤틀리고 굴곡진 과거를 가지고 있고, 그 과거가 현대의 모호함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된다.

- 국외거주자 단어가 영어에 처음 등장한 것은 18세기다.

- '고국을 떠나다'라는 동사의 형태였다.

- 프랑스어에서 차용된 것으로 누군가를 유배시키거나 추방한다는 의미다.

- 고국을 떠나는 결정에 대한 자유 선택을 강조함으로써 현대적 의미에 더 가까워졌다.

- 19세기말, 프랑스로 이주하여 퇴폐적인 생활 방식으로 유명해진 부유한 백인 미국인 집단을 설명하는 단어로 명사화되었다.

4) 국외거주자들은 좀 더 평범한 종류의 이주민이나 이주 노동자로 오인될까 봐 겁난 것처럼 필사적으로 강변한다.

 

5. 저자노트, 아홉 번째

1) 현재 있는 곳에 계속해서 머무르는 것이 정상인 세상에서 이동은 일탈이다.

2) 이러한 세상에서는 생명이 위협에 처하거나 자신이 보유한 기술이 지구의 다른 지역에서 필요해지는 것처럼 특별한 상황에서만 이주가 허락된다.

3) 그런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집에 머물러 있거나 적어도 태어난 국가에서 계속 살아야 한다.

4) 이주 충동이나 다른 곳에 대한 갈망은 해외 휴가와 순례처럼 무해한 행위로 대체하면 된다.

5) 이주가 비정상적이고 인류 역사에서 이주의 역할을 잊도록 권장하는 세상이 된 것 같다.

6) 고향은 신성시되고 낭만화되는 반면 낯선 것은 두려움의 대상이다.

 

10장 자유, 할렘, 무지개 부족

 

1. 미국 이민에 대해 1924년 매디슨 그랜트가 제안한 더 엄격하고 새로운 규정이 도입되었다.

- 연간 쿼터는 50%나 감소해 더욱 줄었다,.

- 북유럽인들에게 유리하게 개정되어 더 편파적인 법이 되었다.

- 그랜트는 "우리는 북유럽 인종이 열등한 인종들에게 압도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적시에 문을 닫았다."라고 언급했다.

 

2. 법 개정으로 이민자의 미국 정착 허가 여부의 결정은 엘리섬이나 다른 입국 지점이 아닌 미국 대사관에서 이루어졌다.

- 이민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새로 시작된 국외 관료제도의 성자은 다른 국가에서도 일반화되었다.

- 미국이 대부분의 신규 이민자들에게 국경을 제한하기로 한 이후 연쇄적으로 내린 여러 조치들 중 첫 번째에 불과하다.

- 두 번째 결과는 수많은 남부 및 동부 유럽인들의 입국을 차단시킴으로써 북유럽 혈통의 사람들이 미국에서 지속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지배를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 이러한 입국 제한 조치는 박해받는 집단이나 난민들이 이주를 통해 탈출하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 이렇게 거부당한 이민 희망자들 중에는 수많은 유럽 유대인들이 포함되었고, 그들은 나중에 나치의 손에 죽게 된다.

 

3. 정부가 이민에 제한을 가함에 따라 다른 유형의 이주 또한 급격히 증가했다.

- 캐나다나 멕시코를 통해 미국으로 들어오는 밀입국

 

4. 뉴욕의 흑인 문화 르네상스는 할렘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 할렘은 유럽 이민자들의 근거지였다.

- 유럽 이민자들은 점차 더 시내 쪽 아니면 뉴욕 시 밖으로 이동했고, 할렘 중심부에 흑인들이 살게 되었다.

- 할렘 르네상스의 주요 인물들은 대부분 남부에서 이주해 온 이들이었다.

 

5. 저자 노트, 마지막

1) 우리가 농업을 통해 정착 생활에 길들여지고, 특정 땅에 묶이기 전까지는 모두가 한때는 유목민이었다.

2) 유목민이라는 단어가 인생의 대부분을 이동하면서 사는 것을 선택하거나,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많은 사람들이 낭만화한 포괄적 용어가 되면서 새 생명을 얻었다.

- 인터넷 덕분에 원하는 곳 어디에서나 일할 수 있는 '디지털 유목민'이 있다.

3) 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살 수 없고, 누군가는 세계 어디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것일까?

- 이 질문은 모든 이의 자유 이주를 주장할 뿐만 아니라 영토에 대한 국가의 주권에 도전하는 것이다.

- 대부분 정주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삶의 방식이 유목민보다 우월하다고 절대적으로 확신했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다.

 

11장 이주 노동자, 미국, 멕시코

 

1. 이주 노동자를 의미하는 독일어 가스트아르바이터는 의미 그대로 표현하면 손님 노동자라는 뜻이다.

1) 이 단어는 세심하게 만들어낸 용어로 문자 그대로 '외국인 노동자'를 의미하는 독일어 프렘트아르바이터가 나치와의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사용하기 곤란해지자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2) '손님'리라는 단어 사용은 노동자들이 과거보다 더 친절한 대우를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으로 볼 수도 있다.

3) 이 말은 또한 이주가 일시적인 성격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4) 이주 노동자들은 손님이므로 집으로 돌아가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5) 그들은 특정한 경제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근로자로 잠시 머물 뿐이었다.

 

2. 이주 노동자에 대한 편견은 경기 침체에 따라 점차 증가했고, 이는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이주 노동자 모델을 채택한 다른 국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 이주민 공동체가 보다 효과적으로 조직화하고 노동조합 또는 사회적, 문화적 협회의 형태로 지원 네트워크를 개발하도록 장려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2) 또한 특정 국가에서 온 이민들이 서로 가까이 살고 싶어 하게 만들었다.

 

3. 백인들이 전쟁 이후에는 더 이상 자신들을 이주민이라고 생각하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1) 1950년대 이전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백인 일색이었고 단일 문화였다는 주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펼친다.

2) 프랑스와 영국의 백인 조상이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그곳에서 살았다고 주장함으로써 정착주의와 인종적 순수성, 민족국가라는 세 가지를 동시에 미화시킨다.

 

4. 우리는 정주주의를 추구함으로써 과거와의 연속성, 이주의 정상성과 상호 연결성에 대한 인식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1) 제국의 상실이라는 '국가적 상처'와 프랑스와 영국 양국에서 잔존한 제국주의 사고방식은 이민들에 대한 반역사적인 태도가 형성되는데 일조했다.

2) 양국의 백인 이주 역사는 대개 잊혔다.

3) 그리고 입맛에 따라 그 역사가 기억될 때는 아주 특별한 경우로 기억되었다.

4) 자신들의 이주는 야만인들에게 문명을 전달하려는 시도였으며, 프랑스와 영국이 자국 내 이민자들에게서 배울 것이 많다는 주장은 심한 반발을 샀다.

5) 이민자들을 환영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 또한 교만하여 마치 이민자들은 정주주의 세계에서 집을 찾고 있는 불쌍한 존재들이라는 듯이 대했다.

 

5. 전후 미국 내 경제적 역할 면에서 유럽의 이주 노동자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은 멕시코인들로 이들은 대개 허가 없이 수십만 명이 북쪽으로 이주했다.

1) 오늘날 미국- 멕시코 국경을 사람들이 최초로 넘은 것은 1만 년 전의 일이었다.

2) 그들은 현대의 이주민들과는 달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했다.

3) 멕시코인들의 이주에 대한 논쟁에는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멕시코가 텍사스와 캘리포니아를 포함하여 지금의 미국 깊숙이까지 뻗어 있었다는 사실이 간과되곤 한다.

4) 미국에서 멕시코계 인구가 처음으로 크게 증가한 것은 이주 때문이 아니라 정복 때문이었다.

- 1848년 전쟁이 끝난 후 멕시코는 영토의 절반을 미국에 넘겨야 했다.

- 10만 명 이상의 멕시코인들이 새로운 국가의 주민으로 편입되었다.

- 1930년 대공황으로 멕시코 노동력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자, 미국에 살고 있던 수십만 명의 멕시코인들이 추방당했다.

-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하면서 멕시코인들의 노동력이 다시 필요해졌다.

 

6. 오늘날 국경을 넘는 움직임을 통제하지 못하는 문제는 이주 역사의 맥락에서 숙고해 볼 가치가 있다.

1) 위험을 무릅쓰고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려는 의지는 인류 역사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2) 전 세계 수많은 이주민들에게 이주라는 개념은 독립을 의미하기도 한다.

3) 이주를 통해 보수적인 문화와 가족의 통제를 벗어나고, 부모처럼 되지 않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4) 그중 어느 하나라도 이루기 위해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5) 고대부터 인간이 이주하는 이유 중에는 실용적이지 않는 것들과 실용적인 것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항상 그래왔다.

6) 국경과 민족국가가 있는 오늘날의 정주주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 역사를 너무나 자주 잊고 있다.

7) 우리는 인간이 지루하거나 호기심 혹은 모험심 때문에, 아니면 도전을 즐기거나 꿈을 이루고 싶어서 이주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잊었다.

8) 수천 년 동안 인류는 지구의 거의 모든 곳으로 이주했고, 그것을 막으려는 온갖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다.

9) 이주의 역사야말로 우리의 가장 가까운 사촌인 유인원과 인류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게 하는 것 중 하나다.

10) 이주민과 이주민 후손으로서 우리의 역사가 모두의 공통점이라는 사실을 인전해야 한다.

 

4. 느낌

 

인간이 이주를 하는 것은 생존 욕구의 반영이다.

인간의 모든 욕구의 근본은 생존이다.

그 생존을 위해서 생존에 적합한 지역을 찾기 위해 이주를 선택한다.

 

생존이 일정 기간 확보가 되는 순간 그곳에 정착을 한다.

그곳이 생존에 적합하지 않다면 다시 이주를 한다.

 

우리는 고대 인류의 이주민의 후손인 것은 맞다.

그러나 그들이 살던 시대는 영토 개념도, 민족 개념도 생겨나지 않았다.

그들 가족, 부족은 가족과 부족의 생존에 적합한 장소를 위해 이주를 한 것이다.

 

인류의 사상적 발전으로 만들어진 민족, 영토, 국가 개념으로 더 이상 인류의 이주는 자유롭지 않다.

언제나 이주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주에 대한 결정은 자신뿐 아니라 구성원, 그리고 이주하려는 국가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한 시대다.

 

인류의 정착은 생존에 적합한 영토의 확보, 구성원의 결집, 구성원의 통제 등 

이주하는 인류보다 생존과 통제가 쉽다.

그렇기에 인류는 이주의 장점을 배제하고 정착을 결정했다.

 

이 책은 인간이 이주를 통해서 어떻게 성장해 왔는지를 역사적으로 나타나는, 혹은 숨은 사실을 통해 알려주는 책이다.

다만, 이주가 스스로의 결정이 아닌 강제적으로 행해지는 것에 대한 비판과

이주를 하지 못하게 막는 현실에 대한 비판은 읽을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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